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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다완의 미감] ② 이도다완 내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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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1-25 22:17:03 수정 : 2013-11-27 1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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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남·북방 도자기술 융합… 고려 본연의 색깔 입혔다 ◆조선에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로 건너온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국에 차문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다르게 일상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옛날부터 한반도에는 차가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잡기설도 이런 배경에서 생성됐으며 막사발론의 단초가 됐다. 우리는 단순히 야나기 무네요시를 조선의 백자와 민예품을 특별히 아낀 조선을 사랑한 문화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골동품 수집가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한 박병래(1903∼1974)씨의 글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성모병원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한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은 책 ‘도자여적(陶磁餘滴)’엔 그가 야나기 무네요시를 직접 만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박씨는 한마디로 “야나기 무네요시가 도자기나 골동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식견이 깊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박씨는 조선민예에 대한 야나기의 시각은 ‘소설’이라고까지 했다. 야나기는 조선의 민예에 대해 “억압당한 운명의 고요한 정적이 깃들이고 마음의 저 깊은 속에서 우러나는 생명의 소리”라며, 따라서 “비참한 운명을 누대로 겪은 조선은 예술을 통해 군왕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조선의 예술은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소성의 발로”라고 했다. 언뜻 보면 찬양하고 있는 듯하지만 식민지 숙명론이 숨겨져 있다.

박씨는 “야나기는 감상적인 온정이나 동화(同化)의 주장으로 우리를 한층 비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꼬집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아닌 예술을 통한 내면의 이해를 촉구한 야나기의 논리는 식민지 문화통치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기간 일본인과 조선인에 의한 한반도의 차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통사적이지 못했다. 요즘도 다완연구와 차문화연구가 연계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차의 종류에 따라 어떤 다완이 어떻게 쓰였는지 쓰임새연구도 과제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돌 석(石)변의 완자를 쓰는 다완(茶碗)이란 용어는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한 단어로 우리는 임진왜란 이후에 쓰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이전엔 가루차용 찻사발을 다구(茶?), 다완(茶椀)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가루차를 마시는 찻사발을 다구(茶?), 잎차를 마시는 찻사발을 다완(茶椀)이라 했고, 두 단어는 고려 후기부터 혼용됐다. 나무 목(木)변의 완자를 쓰는 다완(茶椀)의 명칭이 우리의 표현인 것이다..

한반도의 차문화는 여러 자료에서 풍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고려 후기 대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이며,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1539∼1609)는 ‘절기의 오고 감’이란 시에서 “나의 삶, 다완(茶椀)과 시를 지어 담아 놓는 시통(詩筒)만 있으면 족하리(茶椀詩筒足此生)”라고 했다. 조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1572∼1645)은 병이 나서 지인들과 편지마저 끊어지고 자신에게 “오직 다구(茶?)의 온전한 기미만 남아 있다(唯有茶?全氣味)”고 토로했을 정도다. 

①11세기 고려 해무리굽 다완 내면. 지름 14.9㎝, 높이 5.4㎝, 무게 260g.
◆이도다완에 남겨진 중국 북방지역 도자기술의 흔적


한국 도자사에서 도기(陶器)시대를 마감하고 자기(瓷器)시대로의 진입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에 차를 마시기 위한 고려청자 다완이 만들어졌다. 한국의 초기 청자가 출현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었다. 초기 고려청자 시기인 10세기엔 중국 남방 도공의 이주로 인한 기술유입으로 해무리굽 다완을 생산하게 된다. 11세기 무렵 고려가 중국 북방지역으로부터 도자기 굽는 기술, 도자기 형태, 장식 기법 등 새로운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완 안쪽바닥이 동그란 내저원각(內底圓刻)’의 한국식 해무리굽으로 발전했다.(사진1) 중국 남·북방의 도자기술을 융합해 고려 나름의 색깔을 드러낸 것이다. 다완의 내저원각은 새로 발굴한 이도다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사진2)

이도다완의 안쪽바닥을 보면 모래가 녹은 흔적이 있다. 이는 다완을 포개어 굽는 과정에 쓰인 내화토 비짐 자국으로 중국 북방지역 도자기술의 영향이다. 10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초까지 요나라(916∼1125)와 고려의 문물교류는 활발했다. 요나라 지역의 가마 대부분은 기물의 굽 접지면에 4개 정도의 내화토를 받치고 기물을 포개어 구웠는데, 희검은 모래 섞인 내화토를 둥그스름하게 빚어 받쳐 굽는 방식이었다. 

②세계일보가 새로 발굴한 16세기 이도다완의 내면. 지름 14㎝, 높이 8㎝, 무게 266g.
이도다완은 태토의 입자가 거칠고 기공이 많아 푸석푸석하여 경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연질(軟質)이다. 이는 고려백자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경질(硬質)인 조선백자와는 다르다. 경질백자란 불순물이 적은 고운 백토를 이용하여 높은 온도에서 완전히 자화시킨 백자를 말한다.

고려는 백자기술을 가진 중국 북방지역 장인의 이주로 청자와 전혀 다른 태토와 유약을 사용하여 연질 백자를 만들었다. 중국 남방과 다르게 한 가마에서 청자와 백자를 함께 구웠다. 조선시대 연질백자는 분청사기와 함께 구워졌다. 청자나 분청사기가 자화되는 온도에 맞춰 불을 지폈기에 청자나 분청사기는 잘 익어 경질이 됐으나, 백자는 덜 구워져 연질백자가 됐던 것이다.

이도다완은 다완의 입술이 밖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이는 14세기 고려청자 사발이 14세기 전반 원대 경덕진(景德鎭) 도자 기형의 영향을 받은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조선의 분청사기는 원나라의 자주요(磁州窯), 경질백자는 명나라의 경덕진요(景德鎭窯)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부분 입술이 밖으로 벌어져 있는데 반해 이도다완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③17세기 고키다완 내면. 지름 14.5㎝, 높이 8.7㎝, 무게 336g.
임진왜란 이후 이도다완의 태토와 유약을 찾으려는 노력은 일본 주문 다완인 고키(吳器)다완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고키다완의 안쪽과 바닥은 가루차에 더 적합하게 변화됐다.(사진3)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당시 왕족과 재상 집안에서는 북송(北宋)풍이 매우 유행했고,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장인이 열에 하나 꼴이었다. 고려에 중국의 남방과 북방의 제조기술이 모두 공존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시대 고려다완을 사용한 가루차 문화는 요나라 묘실 벽화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묘실 벽화는 묘 주인이 살아있을 때의 멋진 생활을 대표적으로 그린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기념사진 같은 것이다. 1974∼1993년에 허베이(河北)성 장자커우(張家口) 쉔화(宣化)구 샤파리(下八里)촌에서 발굴된 요나라 말기 장(張)씨 가족묘 9곳 가운데 8곳에 아랫사람들이 차를 준비하고 올리는 광경을 그린 벽화가 있다. 이는 차를 생산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던 중국 북방지역에서 차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보여준다. 

④1116년 요나라 장세경묘 후실 서벽에 그려진 ‘비다도(備茶圖)’. 왼쪽 남자가 왼손에 까맣게 옻칠한 나무 잔탁에 놓인 다완을 들고 오른손으로 차를 젓는 도구인 차술로 가루차를 휘젓고 있다.
1116년 요나라 장세경(張世卿)묘 후실의 동벽과 서벽 벽화는 거란 귀족이 가루차를 즐겼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왼쪽 남자가 왼손에 까맣게 옻칠한 나무 잔탁에 놓인 다완을 들고 오른손으로 차술을 쥐고 가루차를 휘젓고 있다.(사진4) 다완은 요나라 백자다완으로 기형은 11세기 고려 해무리굽 다완(사진1)과 비슷하다. 원나라 벽화에는 차술 대신 젓가락으로 다완에 담긴 가루차를 젓는 그림도 있다.

차술은 차겨루기인 명전(茗戰)에서 가루차와 뜨거운 물이 섞여 좋은 차를 제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려 말 문신 이연종은 박충좌에게 차를 받고 고마움을 나타낸 시에서 소년 시절에 영남 절간에 손님으로 신선놀이인 명전을 여러 번 했는데, 중들의 솜씨가 능숙해 찻사발에 가루차를 쉬지 않고 집어넣었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이도다완이 이 같은 한국차·도자문화사의 맥락에서 탄생됐다는 점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해무리굽 다완=역삼각형의 몸체에 굽다리가 해무리 모습으로 넓고 낮은 다완. 크기는 지름 15㎝, 높이 6㎝ 내외다. 굽폭은 1㎝ 정도로 넓고 주로 다완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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