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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애독서] 김종서 죽음은 조선의 정상적 헌정질서의 종말

입력 : 2013-11-01 20:10:25 수정 : 2013-11-01 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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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지음, 옥당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옥당)


1453년 10월 10일 늦은 저녁, 조선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호’라 불리던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하수인이 휘두른 철퇴를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진 것이다. 계유년(단종 1년)에 벌어진 이 쿠데타를 두고 수양대군 측은 계유정난이라 이름 붙였다. ‘정난(靖難)’이란,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의 저자 이덕일은 이렇게 쓰고 있다. “김종서의 죽음은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종의 죽음이자 그가 섬겼던 세 임금, 즉 태종과 세종, 문종이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죽음이었다. 또한 정상적인 군신관계의 종말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과다한 세금에 시달린다는 장계가 올라오면 현지에 김종서를 감찰어사로 파견했다. 김종서는 굶주리고 있는 백성의 수를 낱낱이 조사해 면세를 요청하고, 어떤 고관도 불법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간쟁하고 탄핵했다. 그는 ‘문’으로는 임금과 학문을 논하는 지경연사(知經筵事)였고, ‘무’로는 북방영토를 개척하는 문무겸전의 대신이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김종서는 당대 최고의 역사가였다. 성균관 생원들은 그를 태산북두같이 우러러보며 성균관을 맡게 해달라고 문종에게 공동 상언을 올렸다. “몸집은 작고 장수로서 마땅한 체격은 아니다. 다만 그가 일을 만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다.” 세종이 김종서를 일컬어 한 말이다.

의문사한 문종은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내 뒤를 잇는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하라”는 부탁을 남겼다. 수양대군 등을 경계한 ‘유명’이었다. 온갖 병에 시달리던 세종은 문종과 함께 정사를 나눴다. 세종 대 후반의 치적은 문종이 있어 가능했다. 문종실록은 문종의 죽음에 대해 “이때 사왕(단종)의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 상사 때보다 더하였다”고 기록했다.

이주한 역사비평가
권력욕에 불타던 수양대군과 한명회, 권람 등은 김종서를 가장 두려워했다. 김종서 제거가 쿠데타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수양은 김종서 부자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효수했다. 수양 측에서 기록한 ‘노산군일기’는 당시의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날(김종서가 죽은 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해지자 유시(별똥)가 떨어졌다.” 

김종서는 사망한 지 293년 후인 영조 22년에 신원되고, 영조 34년에 ‘충익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는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을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으로 승격시켰다. 김종서는 사필귀정의 표본이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이런 조선사의 전체 맥락을 긴박하면서도 유장하게 그려냈다. 조선사의 맥락을 꿰면서 역사와 인간을 반추시키는 힘이 탁월한 역작이다. 북방영토 개척의 적임자로 세종의 명을 받아 함길도 길주에 도착한 김종서는 “긴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라는 소회를 남겼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다 죽을 것인가. “그대는 거칠 것이 없는가?”하는 대호 김종서의 포효가 쩌렁쩌렁하다.

이주한 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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