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명품조연’이나 ‘씬스틸러(Saene Stealer)’라는 타이틀은 성동일 김정태 김성오 조성하 고창석 안길강 이한위 등 남자배우들에게 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호황을 맞고 있고, 그만큼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하지만 큰 예산이 투입된 대작인 경우, 남자의 거친 세계를 무대로 한 영화들이 월등히 많다 보니 여자배우보다는 남자배우들의 활동이 더 주목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요즘 제작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남자배우들 못지않은 개성과 존재감을 발산하는 여자 명품조연 배우들의 두드러진 활약을 볼 수 있다.
지난 9월 개봉한 코믹 첩보 액션 ‘스파이’(감독 이승준)에서 다니엘 헤니만 보면 '침을 흘리던' ‘야쿠르트 요원’ 라미란(38), SBS 주말극 ‘결혼의 여신’에서 오직 남편 뒷바라지만 하며 살았지만 결국 배신당하는 아줌마를 연기한 장영남(40), 그리고 영화 ‘감시자들’(감독 조의석·김병서)과 최근 종영한 KBS드라마 ‘굿 닥터’에서 열연한 진경(41) 등이 바로 그들이다.
![]() |
'스파이' 라미란 |
관객들에게 아직은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영화의 누구’라고 설명해주면 “아~ 그 배우”라며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그녀가 바로 ‘라미란’이다. 1975년생인 그는 만 30세의 나이에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에 오수희 역으로 출연하며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 때부터 ‘괴물’ ‘음란서생’ ‘잘살아보세’ ‘육혈포 강도단’ ‘거북이 달린다’ ‘댄싱퀸’ ‘두 개의 달’ ‘연애의 온도’ 등 단역과 조연 가리지 않는 다작(多作) 활동으로 꾸준히 관객들에게 어필해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대중에 알리기 시작한 건 SBS 드라마 ‘패션왕’(2012)이었다. 당시 그는 유아인이 운영하는 의류공장 미싱공 아줌마로 출연해 감칠맛 나는 연기를 펼쳤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영화가 28편, 드라마는 7편이다. 이제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연기자 중 한 사람이 됐다. 라미란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실 지난 몇 달간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엄마가 신경써주지 못해 미안한 부분이 많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스파이’에서 그는 국가첩보원 설경구가 어디서 뭘 하든 쏜살같이 나타나 상부의 지령을 전달하는 아줌마 요원으로 분했다. 특히 미남 다니엘 헤니만 보면 본분을 잊고 나서는 코믹한 설정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그의 감초연기는 상영 중인 영화 ‘소원’(감독 이준익)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아동성범죄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 부부를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착한 이웃이자 친구 영석엄마로 분했다.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극의 분위기를 코믹한 대사와 푸근한 표정으로 완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소원’에 출연하게 된 건 ‘스파이’에서 함께한 설경구의 추천 덕이 컸다. 설경구는 “스파이를 같이 찍을 때만 해도, 라미란이 누군지도 몰랐고 친하지도 않았다”면서 “그런데 함께 연기해보니 연기도, 성격도 괜찮더라. 이준익 감독님께 적극 추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현재 JTBC 주말극 ‘맏이’, 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2’ 등을 촬영 중이다.
![]() |
'공정사회' 장영남 |
검은색 뿔테 안경을 끼고 위아래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으면 국가정보원이나 교수·캐리어 우먼, 일바지(몸빼)에 꽃무늬 늘어진 티셔츠를 입으면 영락없는 평범한 아낙네의 모습이 된다.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장영남은 오직 잘생긴 외모 하나 보고 남편과 결혼해 순종적으로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남편의 외도로 일생일대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 아줌마 권은희로 분했다. 은희는 남편의 온갖 모진 말과 무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과 시댁, 아이들을 챙기기에 바쁘다. 그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저렇게 바보 같은 아줌마가 또 있을까’라며 혀를 끌끌 하면서도 지고지순하고 착한 심성에 곧바로 매료된다. 남편을 향한 반격과 복수를 꿈꾸는 은희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지난해 하반기 개봉한 ‘늑대소년’(감독 조성희)에서도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늑대소년(송중기)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안아주는 엄마 역을 맡은 그는 송중기·박보영 등 스타급 주연배우들 말고도 흥행의 숨은 주역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열린 ‘제2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보다 앞서 개봉한 ‘공정사회’(감독 이지승·2012)는 그에게 주연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알린 작품이었다. 성폭행 당한 딸아이를 대신해 처절한 복수를 꿈꾸는 엄마를 연기했다. 선인지 악인지 구분이 애매한 가운데, ‘모성’을 바탕으로 한 복잡한 내면연기를 훌륭히 소화했다.
연극무대로 데뷔해 긴 무명시절을 겪은 배우 장영남의 진가를 알아본 건 다름 아닌 장진 감독이었다. ‘아는 여자’(2004) ‘박수칠 때 떠나라’(2005) ‘거룩한 계보’(2006) ‘아들’(2007)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장진 감독 사단의 영화에 줄줄이 출연하며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았다. 장영남은 한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열심히 했지만,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아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다”며 힘들었던 무명시절을 회고했다.
그런 그가 대중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작품은 시청률 40%를 넘긴 화제의 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 MBC)이었다. 단 1회 특별출연. 여주인공 연우/월(한가인 분)의 엄마인 무녀 아리로 분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참히 죽임 당하는 역할을 연기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이 작품에서 충혈된 눈으로 피를 토하며 윤대형 일가에 저주를 퍼붓는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 내달 16일 개봉하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 2’에 출연, 약 1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다.
![]() |
'감시자들' 진경 |
배우 진경 역시 오랜 시간 연극을 통해 쌓은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충무로, 여의도의 러브콜을 꾸준히 받고 있다. 그가 작품에서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건 지난해 최고 시청률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굴당, KBS)을 통해서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채 똑 부러진 소리만 하는 교사이자 며느리 역을 맡아 코믹함과 진지함을 오가는 연기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중저음 목소리 때문인가. 아무런 설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선생님 역할이 잘 어울린대요.”
‘넝굴당’ 이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힘내요 미스터 김’ ‘여왕의 교실’ ‘굿 닥터’ 등 드라마에 줄줄이 캐스팅됐다. 지난 7월 개봉해 550만 관객을 동원한 ‘감시자들’에서는 설경구·한효주 등 경찰 감시요원을 총지휘하는 이 실장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최근에는 그의 독특한 이력도 화제가 됐다. 명문 대원외고에 2등으로 입학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엄친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드라마 ‘구가의 서’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최준혁의 연기지도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두각을 보이기 전, 그는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으로 알려진 연극 ‘이(爾)’에 약 10년간 출연해 연극계에서는 이미 '유명배우'였다. 그에게 무대는 고향과도 같다.
인터뷰에서 그는 “2010년 ‘이’ 10주년 무대를 올렸는데, 그때 저를 찾아오는 기자들이 한 분도 없어 서운했다”면서 “그때 ‘배우가 됐으니 내 이름은 좀 더 많은 대중에 알릴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제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진경씨’라며 먼저 말 걸어주는 팬들이 계셔서 신기하고 행복할 따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8일 ‘굿닥터’가 종영했지만, 배우 진경은 쉬지 않는다. 21일 첫 방송을 시작한 tvN ‘빠스껫 볼’에서 목로주점의 주모 ‘밤실댁’ 역을 맡아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세계닷컴 DB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