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라즈는 테헤란에서 900㎞가량 떨어진 이란 남서부 도시다. ‘페르시아의 심장’ 혹은 ‘페르시아의 얼굴’로 불리는 곳이다. 광대한 문명세계를 장악했던 페르시아의 본향인 셈이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255∼333년)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인도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까지 페르시아 천하였다. 중국을 제외한 모든 문명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제국’이었다. 지금의 ‘이란’은 1935년 팔레비 왕이 ‘아리아인의 나라’라는 의미로 바꾼 국호다.
시라즈는 꽃과 시인들의 향훈으로 이방인을 맞았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라즈에 가면 가장 가슴 설렐 공간으로 떠올린 곳은 바로 ‘에람 정원’이었다. 꿀과 우유와 물과 술이 흐르는 파라다이스가 그곳이었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에람’은 페르시아어로 ‘천국’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정원들은 대부분 일정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가운데에 연못을 파고 이곳을 기점으로 정확하게 네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만든다. 페르시아에서 천국의 개념은 물과 꿀과 우유와 술이 흘러넘치는 곳이거니와 이 네 물길은 바로 하늘에서 내린 이 네 가지 음료를 상징한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이 ‘페르시아 가든’이라는 의미라고 하니 페르시아 정원은 지상에 꾸려놓은 천국인 셈이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도 페르시아 정원을 모방했다고 한다.
정문을 지나자 곧바로 화사한 궁전이 보인다. 사각의 큰 연못에 가득한 맑은 물이 궁전을 비추고 있다. 이 연못으로부터 네 방향으로 길게 물길이 뻗어나간다. 물길의 한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석류나무 숲이 나타났다. 따뜻하고 맑은 주홍의 석류꽃이 연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빛나고 있었다. 석류야말로 실크로드를 건너 페르시아의 문물이 한반도까지 이어졌음을 웅변하는 과실이다. 페르시아 지역이 원산지인 석류의 한자 이름은 안석류(安石榴)다. ‘안석’이 페르시아를 가리키는 안식국(安息國)을 지칭하는 의미이고 보면 석류는 페르시아로부터 실크로드를 타고 동서로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이름에서부터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류는 건강에도 좋을 뿐 아니라 씨를 많이 품고 있어 다산(多産)의 상징으로도 사랑받았다.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페르사포리스 궁전을 건립할 때 석류나무 꽃과 잎의 디자인을 궁전에 도입하고, 자신의 의복과 장신구에도 그 디자인을 사용했다. 석류의 효용가치가 높아 예로부터 이 과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에는 기원전 3세기 한무제 사신으로 서역에 갔던 장건이 페르시아산 석류를 들여와 보급시켰다. 한반도에는 8세기경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복식 유물에서도 석류무늬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석류야말로 가장 오래된 동서 문물교류의 상징인 셈이다.

장미들을 굽어보는 사이프러스 나무도 페르시아를 지켜본 오래된 증인이다. 사이프러스는 페르시아어로 불멸 혹은 영원, 생명을 의미한다. 2500년 전 페르시아에서도 이 날씬하게 큰 키를 자랑하는 사이프러스는 청청했던 모양이다. 페르시아 옛 부조를 보면 사이프러스가 단골로 등장한다. 페르시아 제국의 각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는 행렬에도 사이프러스가 각 부족을 나누는 칸막이 역할을 한다. 돌에 새긴 신라의 문양에서도 나무를 가운데 둔 부조가 발견돼 페르시아를 느끼게 한다. 1000년 넘게 산 사이프러스도 드물지 않다. 중국 산둥성 칭다오 태청궁에 있는 사이프러스는 2000년 나이를 헤아린다. 이름 그대로 불멸의 나무인가. 족히 20m는 넘어 보이는 사이프러스들이 장미와 석류와 하늘의 음료가 흐르는 물길을 굽어보며 산책하는 인간들을 사열한다.
정원의 찻집에 들어서니 석류 숲길에서 만났던 여학생들이 제비처럼 떠들다가 일제히 일행을 반긴다. 검은 히잡으로 얼굴만 내놓고 머리와 귀를 가리긴 했어도 10대 특유의 활달함마저 가리진 못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한국 아이돌의 근황을 물었다. 이란에도 한류 바람이 불어서 청소년들이 웬만한 드라마는 물론 K-팝 가수들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고 한다. 까만 히잡을 쓴 명랑한 제비들이 우리 주변에 모여들어 밝은 미소를 띤 채 일제히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잠시 한국에서 날아온 늙은 아이돌이었다.
이곳의 시인 사랑은 유별나다. 입으로 떠받드는 게 아니고 가슴으로 몸으로 직접 시인을 모시는 풍토가 시민들의 문화에 뿌리 깊이 스며든 곳이었다. 세계적인 시인으로 일찍이 괴테가 찬양하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허페즈(Hafez Shirazi, 1320년경∼1389)가 시라즈에 누워 있다. 페르시아어가 모어인 지역에는 허페즈의 시집이 대부분의 가정에 비치되어 있다. 허페즈의 시에 영적인 힘이 있어 개인의 길흉을 예언한다고 믿을 정도다. 집을 찾은 손님을 앞에 두고 시집을 펼쳐 점을 볼 정도라니 허페즈 시의 위력이 대단하다.
로크나바드 강변 허페즈 영묘 앞에 새 점을 치는 이들이 보인다. 이들은 허페즈의 시들을 종이에 하나씩 인쇄해 꽂은 박스 위에 앵무새를 올려놓고 고객이 돈을 내면 시 한 편을 새에게 뽑아내게 했다. 김선두 화백에게 앵무새가 건네준 종이에는 페르시아어로 쓰인 시와 화려한 색감의 남녀 그림이 있었다. 그 시의 점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고백하라”는 메시지라고 한다. 환갑이 낼모레인 김 화백, 너털웃음을 웃어젖힌다. 허페즈는 술과 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시 ‘가잘’을 500편이나 남겼다.

허페즈 영묘는 시인을 기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그들은 줄을 지어 시인의 대리석 관 위에 장미를 올리고 손을 얹은 뒤 간절히 기도했다. 이들은 시인의 영묘를 에두른 담 밑을 거닐며 시를 낭송했다. 잠시 들르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1박2일 머무르며 차를 마시고 시를 외우고 꽃그늘 아래서 명상하는 이들도 많다. 허페즈와 함께 인근 사디(1207∼1291)의 영묘도 각광받는 곳이다. 봄이면 오렌지 꽃 향이 날리는 곳이라고 한다. 13세기에 활동한 사디는 ‘과수원’의 시인이다.
꽃과 시인들의 향훈만으로 페르시아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시라즈 인근 페르세폴리스를 향해 가는데 이란 청년들이 승용차로 뒤쫓아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소리친다. 이란인 운전사가 한국이라고 답했더니 이들은 차창을 내리고 일제히 ‘아바마마!’를 외쳤다. 한국 드라마 ‘주몽’이 이곳 텔레비전에서 방영돼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그들의 호들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장금’이 방영됐을 때는 시청률이 80%를 넘겼다고 한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는 말 그대로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뜻이다. 기원전 518년에 짓기 시작해 60년에 걸쳐 완성됐다. 이 거대한 왕도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가 정복한 뒤 불을 질러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2000여년 동안 파묻혀 있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대학 고고학팀의 발굴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광활한 들판을 굽어보며 야트막한 경사지대에 돌기둥과 조형물들로만 흔적을 남기고 있는 페르시아의 고도. 이곳의 벽에는 23개 나라 28개 종족이 조공을 바치러 온 행렬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었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페르시아까지 온 때는 이들의 영화가 사라진 뒤였지만 동서를 잇는 교류의 흔적은 이곳의 풍화된 벽에도 어김없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혜초가 왔던 흔적을 찾아 발길을 이란 북부 지역으로 돌렸다.
글 조용호, 그림 김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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