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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배수진'… 당황한 美 "방위조약 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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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8-06 19:08:27 수정 : 2013-08-06 20: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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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은 1953년 10월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공식 출범했다. 6·25전쟁이 그해 7월27일 정전협정으로 미봉된 직후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제시하면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듬해인 54년 11월에는 한·미가 ‘군사 및 경제 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을 교환했다. 상호방위조약의 후속조치인 이 의사록을 통해 미국은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는 대신 7억달러 규모의 군사·경제원조를 약속했다. 이로써 한반도 전쟁 재발 방지와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마련됐다. 순탄치 않은 과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처방을 동원해가며 미국을 압박한 끝에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졌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꺼린 미국


6·25전쟁이 38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51년 7월10일 유엔군과 공산 진영은 개성에서 만나 휴전협상을 본격화했다.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휴전으로 유엔군이 철수한 뒤 북한이 다시 침략해오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 독자적으로는 이를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 대통령은 휴전협상에 앞서 “한국민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침략이 장차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을 해줘야 한다”며 미국을 압박했다. 상호방위조약을 ‘휴전 전’에 체결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1953년 8월8일 변영태 외무부장관(왼쪽)과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와 ‘태평양안전보장조약’(ANZUS)을 맺고 일본과도 방위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한국은 태평양지역 반공국가의 방위동맹에서 제외된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과 유엔이 한국을 공산주의자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만큼 미국의 한국 방위 의지를 웅변하고 있는 증거는 없다”면서 방위조약 체결에 부정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의 이런 입장 속에는 한·미동맹 관계가 휴전을 반대하는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 의지를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섞여 있었다.

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일시에 석방하는 파격조치를 단행한 뒤 광주시민들이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배수진 친 이승만


53년 1월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한국의 압박 수위도 날로 높아져 갔다. 이 대통령은 미국을 향해 노골적으로 “유엔이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시키지 않는다면 한국군은 유엔군의 지휘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압록강까지 진군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서 휴전반대 궐기대회와 민중대회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미 정부의 확답이 없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기가 마련됐다. 53년 3월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배후 지원했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돌연 숨진 것이다. 그동안 전쟁포로 송환를 둘러싼 이견으로 휴전협상을 무기 휴회했던 유엔군과 공산 진영은 부상포로 교환 협약에 서명했다(4월11일). 이어 6월8일에는 송환거부 포로 문제를 놓고 양측이 중립국 관리 방안에 합의함으로써 정전협정은 이제 정식 조인식만 남은 상황이 됐다. 그런데도 휴전 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를 일시에 석방하는 비장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이 대통령이 미국과의 갈등을 무릅쓰고 꺼내든 극약처방이었다. 6월18일 새벽 부산·마산·광주·논산 등지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으로 송환되길 거부하는 반공포로 2만7000여명이 일제히 수용소 담벼락과 철조망을 넘었다. 자유를 갈구하는 반공포로 석방에 전국에서 시민들의 지지시위가 이어지기도 했다. 유엔군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석방된 반공포로의 재수용을 요구하는 공산 진영의 반발로 휴전협상은 파탄 위기에 봉착했다.

북한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했던 반공포로들이 혈서한 명부.
◆갈등을 넘어 동맹의 길로


반공포로의 석방에 당황한 미 정부는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협의하기 위해 월터 로버트슨 극동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급파했다.

6월26일부터 17일간 계속된 로버트슨과의 마라톤 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휴전을 수용하는 대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된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해 8월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서울에서 만나 가조인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정식 서명은 10월1일 워싱턴에서 이뤄졌고, 이듬해인 54년 1월 한국 국회와 미 의회에서 인준됐다.

그러나 조약의 정식 발효는 11월에 가서야 이뤄졌다. 한국의 단독북진을 막을 수 있는 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과 규모에 대한 양국 간 이견 때문이었다.

이후 상호방위조약은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 합중국 간의 합의의사록에서 구체화됐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전문과 제1조 내용.
의사록은 작전통제전과 관련,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하에 둔다(제2조)”고 명시했다. 이러한 규정은 당시 미측이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을 막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어렵사리 맺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전후 한·미동맹의 핵심으로 지난 60년간 북한의 침략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 정부의 조약 이행에 대한 실천이 뒤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선임연구원·박병진 군사전문기자 worldp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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