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서울작가축제’에서 만난 미국 시인 요한 고란슨(41)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히스테리아’가 도대체 어떻기에 이역만리 외국 시인의 마음까지 움직였을까. 잠시 음미해보자.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발작하며 울부짖으려다 손으로 아랫배를 꽉 누른다 심호흡한다 만지지 마 제발 기대지 말라고 신경질나게 왜 이래 팽팽해진 가죽을 찢고 여우든 늑대든 튀어나오려고 한다.”(‘히스테리아’ 중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고발하는 시를 주로 써온 김이듬(44)씨가 네 번째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서정시학)를 펴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한 경험과 생각이 많이 녹아든 작품집이다. 시인은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4개월 동안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유학했다.
이번 시집은 ‘기괴하고 실험적인’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모처럼 삶의 여유를 되찾은 시인은 낯선 독일 문화를 익히기 위해 발길이 닿는 곳마다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를 기웃거린다. 한국과 달리 ‘알몸’에 무척 관대한 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시인도 자연스레 ‘날것’ 그대로의 육체에 눈을 뜬다.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형상화한 전작들과 비교하면 이번 시집이 그려낸 몸은 확실히 밝고 유쾌하다. 남자의 나신을 노래할 때 시인은 한껏 발랄하고 대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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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이듬씨가 독일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시인은 2012년 약 4개월 동안 독일에 머문 경험을 토대로 네 번째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를 펴냈다. 서정시학 제공 |
“도무지 뭘 골라야 할지/ 흰 거 샛노란 거 붉은 거 거무스름한 거 수백 가지 종류의 크기도 굵기도 다른 거/ 그나마 익숙해 뵈는 몇 개를 사왔다/ 도마 위에 길쭉하게 세 개를 나열해 놓았다/ 오래 굶어서 상상력이 왕성한가/ 손대기가 그렇다/ 데친 아그리아옹 집어서 소시지들 덮어 버렸다/ 낮에 누드 호숫가에서 나뭇잎으로 성기를 가렸듯이.”(‘소시지’)
시집에 실린 67편의 시는 저마다 독일, 그리고 베를린의 향기를 짙게 풍긴다. 비록 사진은 수록하지 않았지만, 시집을 읽고 있으면 베를린 골목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기행시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올여름 시인의 안내에 따라 독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보자.
“유월 열이튿날/ 친할머니 제삿날/ 밤 열 시 넘어서야 해가 진다/ 멕시코 플라츠 긴 계단을 내려간다/ 지하가 훤하다/ 비로소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길 잃었다/ 내가 사라지자 바깥에 풀이 반짝거린다/ 거긴 새벽이겠다.”(‘백야’)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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