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았던 그곳으로…
인력거·오토바이·자전거·트럭형 버스
수많은 행인들… 곡예 운전의 각축장 착각 2013년 1월23일 오후 1시30분, 비행기가 카트만두에 가까워지자 착륙 준비를 하느라 좌우로 고도를 낮추며 선회했다. 인천을 출발해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긴 비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기내 창으로 무심코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멀리 설봉(雪峰)과 설산(雪山)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바다에서 생성되고 있는 거대한 흰 구름인가 했다. 그때 누군가 “히말라야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승객들이 일제히 창 쪽으로 몸을 기울여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비행기도 같은 방향으로 쏠리는 듯했다.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또 책에서 무수히 보아온 장면이었다. 그런데 두 눈으로 확인하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몇 번을 그 순간에 있다 해도 처음처럼 똑같이 “히말라야다!”라고 외칠 것이었다. ‘히말라야’라고 나도 속으로 되새겨보았다. 몇 년 전 전수일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히말라야∼’라고 부르니 이어서 ‘바람이 머무는 곳’이 메아리쳐왔다.
히말라야로 가는 일이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다. 이십대 초반 내게 먼 곳의 낯선 바람을 전해준 이름들 중 하나가 히말라야였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광화문에 있는 문예지 기자가 되었고, 인근에 있는 프랑스문화원에서 히말라야에 다녀온 청년 화가를 만났다. 그녀에게는 독특하게 건강한 느낌, 시원(始原)의 바람 냄새가 났다. 사진을 매개로 한 설치 미술 전공자였던 그녀는 1980년대가 끝나는 그해, 히말라야에서 찍어온 사진들로 사진전과 함께 슬라이드 상영회를 프랑스문화원과 괴테문화원에서 열었다.
제목은 ‘나마스테로 가는 길’. 나마스테란 힌디어로 ‘당신의 영혼을 환영합니다’라는 뜻. 만나고 헤어질 때 건네는 일반적인 인사말이기도 하고 수행의 궁극적인 전언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의 첫 개인전 포스터에 손 글씨(타이포그라피)를 제공했고, 그 일을 계기로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인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말석에도 참석한 적이 있었다. 먼 곳을 동경하는 문단의 몇몇 젊은 시인과 작가는 네팔과 인도, 히말라야로 떠났다. 당시 내 주변에 감도는 기운으로 보아, 나야말로 누구보다 먼저 히말라야로 달려갈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이 아닌 다른 세상을 떠돌아다닐 뿐, 그곳으로는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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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르바르 광장의 석양을 배경으로 새떼가 사원 지붕을 날아다니고 있다. |
이번에 네팔로 향하면서 티베트와 네팔 기행서인 박완서 선생의 ‘모독’을 서가에서 다시 펼쳐보았다. 책이 발행되던 1997년 1월 이후 그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초판 첫 페이지에 선생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었다. ‘왜 모독인가?’ 처음 받아든 순간부터 든 생각이었고, 매번 맞닥트릴 때마다 반추하는 제목이었다. 마치 지나가는 자가 석양 속에 농사를 마무리하는 농부를 보고 낭만적으로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되새겨졌다. 선생은 카트만두를 세 번 방문하고 나서야 집필을 했다. “처음 보는 것들을 선입관으로 물가게함 없이 싱싱하게, 생으로, 느끼고 싶었다.” 즐거운 문우 지인들과의 여행길이었지만 엄혹한 자연환경 때문에 선생은 당신 생애 가장 고된 여행이었다고 토로했다.
비행기가 착륙을 준비하는 그 짧은 순간 꿈을 꾼 것일까. 누군가의 턱까지 차오른 숨소리가, 자갈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발걸음소리가 귓전에 가까이 또 멀리 들렸다 사라졌다 했다.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착륙을 시도하며 창밖의 시계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러자 방금 내 귓속에 파고든 것이 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의 길고 긴 첫 장면, 최민식이 한국에 노동자로 왔다가 죽은 네팔 사내의 유골을 그 가족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고산증에 시달리며 가파른 산지를 걸어가는 발소리, 숨소리였음을 환기했다. 비행기가 안정적으로 착륙하고 음악이 은은히 흘러나왔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 눈앞에 펼쳐졌던 히말라야의 설봉은 온데간데없었다.
공항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게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 카트만두 시내로 향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열흘 뒤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는 국제문학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심포지엄 전 단계로 4대 문명 발상지이자 불교 탄생지인 네팔과 인도 기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일행 중 대부분은 이 지역을 한두 번 여행한 경험이 있었다. 트리부반 공항에서 시내까지 10㎞, 나는 기내에서 히말라야 설봉을 발견했던 때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사방에서 온갖 종류의 운송 수단들이 순식간에 끼어들어 함께 달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릭샤(인력거), 미니 삼륜차인 템포, 오토바이, 자전거, 트럭형 버스 등. 제각각 속도를 자랑하며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곡예 운전의 각축장 같았다.
나는 한시도 눈을 팔지 않고 카트만두 거리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비슷한 환경의 도시 풍경과는 달리 이곳 네팔 카트만두의 거리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느라 분주했다. 매연과 먼지가 켜를 이루어 도시를 짓누르고 있지만,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생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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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산타푸르 광장 쿠마리 사원 옆에 있는 넓은 공터. 중세에는 전용 코끼리 훈련장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관광기념품 노점상이 즐비해 있다. |
카트만두 공항에서 겨우 한 시간여 시내를 달리고 걸었을 뿐인데, 그동안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 행인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아니 길을 잃는 게 당연했다. 사원의 지붕과 광장을 까맣게 수놓은 비둘기들과 사원 계단마다 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끊임없이 걸어오고 걸어가는 행인들 사이로 석양이 마지막 빛을 내뿜었다. 붉은빛에 물들어 고색 찬연한 중세의 고도(古都)에 서 있자니 단 몇 시간 만에 박완서 선생께서 느꼈던 ‘기억 이전의 세계’에 와 있는 듯했다.
쿠마리 사원을 끝으로 더르바르 광장을 떠났다. 쿠마리는 이곳 사람들이 선택하여 믿고 기리는 살아 있는 여신. 네팔과 인도에는 힌두교의 전통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그들에 따르면, 대략 3억의 신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신들은 탄생하고 있다. 그 많은 신들 중 쿠마리가 독보적인 것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인간·신이라는 점일 것이다. 더르바르 광장을 벗어나 인파에 휩쓸렸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리며 걸었다.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을 향해 얼굴을 내보이던 어린 소녀가 자꾸 눈에 밟혔다. 소녀는 입을 비죽하며 여신 놀이의 기계적인 반복에 따분해 하고 있음을 시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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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빛나는 더르바르 광장과 비둘기 떼. |
카트만두는 표고 1400m에 위치한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의 고도이다. 네와르족이 세운 도시로 그들만의 전통 요리가 있었다. 히말라야로 가는 관문답게 카트만두에는 일찍부터 전 세계 다양한 요리가 들어와 있었다. 네팔리 출로는 옛 라나왕조의 궁전 포라 더르바르를 개조한 식당. 네팔과 네와르족의 전통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입구에서 그들 전통대로 이마에 붉은 티카를 칠해주었다.
식전주로 곡류를 증류시켜 만든 미주(米酒) 락시(raksy)가 나왔다. 넘칠 듯 가득 채워진 토기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을 축였다. 혀끝에 닿기도 전에 입 안에 뜨거운 열기가 확 퍼졌다. 입이 가늘고 긴 놋주전자에서 토기 잔에 술을 따라주는 종업원의 폼이 군더더기 없이 예술적이었다. 투박한 듯 매끄러운 토기 잔의 질감 때문인지, 냉동고처럼 차갑게 얼어가는 식당의 추위 때문인지, 멋들어지게 따르는 폼에 반한 건지, 락시가 잔에 닿자마자 여기저기에서 독한 줄도 모른 채 단숨에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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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전통식당 종업원이 마치 화살을 쏘듯 당당하게 네와르족 전통 쌀술인 락시를 따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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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네팔리 출로’의 전통식 달 바트. 놋 쟁반에 시금치 닭고기 멧돼지 밥 그리고 전통 수프 타마가 차례대로 담겼다.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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