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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시네마 logue] 주먹왕 랄프

입력 : 2013-01-10 22:15:19 수정 : 2013-01-10 2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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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오락실 게임속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
삶은 단순하지 않다. 말하자면, 완전히 나쁜 인간이나 전적으로 선한 인간은 현실에 없다. 그때그때 사람은 나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 이익을 위해 나쁜 짓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의의 거짓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세계에서만큼은 선과 악이 분명히 나뉜다. 아니 어쩌면, 현실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에서만큼은 그것을 더 확실히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눌수록 단순해지고 해석의 여지나 고민의 지점들이 줄어드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유명한 전래 동화 ‘백설공주’의 새엄마는 몇 천년 동안이나 악역을 맡아왔다. 누구도 계모의 심리나 내면 혹은 과거사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게임 속 세계 역시 그렇다. 고전적 8비트 게임 ‘다 고쳐 펠릭스’의 악당 랄프의 삶도 다를 바 없다. 그는 펠릭스가 고칠 만한 것을 제공한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랄프는 깨부수는 게 일이다. 어떤 세계라 하더라도 깨부수는 게 고치는 것보다 환대받을 리는 없다. 

문제는 랄프의 삶이 영업 종료 이후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악당 역할을 맡았기에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 ‘주먹왕 랄프’는 이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게임 속 악당 랄프는 게임이 끝나고도 환대받지 못한다. 게임 속 선한 캐릭터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에 절대 랄프를 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랄프는 다짐한다. 선한 영웅 펠릭스처럼 메달을 따서 그들의 공간을 함께 나누겠다고 말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대개 그렇지만 ‘주먹왕 랄프’는 완벽한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우선 고전적 8비트 게임을 통해 자극하는 아날로그의 정서가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아날로그 정서는 단순히 회고적인 과거의 추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주먹왕 랄프’가 자극하는 아날로그 정서는 바로 겉보기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공감이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지만 제 자리에서 자기 몫을 묵묵히 해나갈 때, 세상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전언도 그렇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불이 꺼진 후의 세상에 대한 디즈니식의 상상력이다. 사실 이 상상력은 ‘토이스토리’ 이후 익숙해진 세계이기도 하다. 잠이 든 후 꿈의 세계를 보여준 ‘몬스터 주식회사’도 유사한 맥락이다.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상상력은 유아기의 특권이기도 하다. 주변의 아무 물건에나 인칭을 부여해서 연극을 꾸며내는 솜씨 역시 유아기에 내린 피조물의 선물이기도 하다.

‘주먹왕 랄프’는 이 유아기적 물활론을 세련화해 게임기가 가득한 오락실을 꿈의 무대로 재해석해낸다. 게임 속 캐릭터들이 코드나 케이블을 통해 정거장에 모이고 그곳에서 각자 자신의 게임기로 들어간다는 설정이나 인기가 많아진 게임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질병을 앓는 게임기가 생긴다는 설정도 재미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외톨이의 고민은 게임 속 캐릭터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들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의 목표, 사람들과 다시 어울려 외톨이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매진한다. 타고난 사회적 지위를 찾는 것과 유지하는 것, 그것은 ‘주먹왕 랄프’가 건네는 건전한 교훈이기도 하다. 누군가 악당을 해야만 한다는 것,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메시지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속에 녹아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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