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국제정치 질서 속에서 역사를 정확한 방향으로 이끈
책임있는 정치지도자의 표본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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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지음/탁재택 옮김/창비/1만5000원 |
1989년 10월 7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동베를린에 왔다. 고르바초프는 주빈국 연설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생은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할 것입니다.”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강조한 얘기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도 금세 이 말의 의미를 알아챘다. 개혁 개방의 대세는 막을 수 없으며 독일 통일도 역사의 흐름대로 갈 것이란 의미였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역사는 순리대로 흘러갔다. 동베를린에 주둔한 소련군 탱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통일의 역사적인 과업을 이뤄낸 바이츠제커의 회고록이 처음 우리말로 소개됐다.
“우리 독일인들은 1989년 11월 9일(베를린 장벽 붕괴일)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가? 냉혹한 국제정치 질서 속에서 어떻게 이룩할 수 있었나?”
책에는 바이츠제커의 이 같은 자문자답과 통일 과정의 숨가쁜 반전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그는 격동의 유럽 한복판에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통독 20년이 지난 2009년 이 책을 썼다. 통일 독일이 앞으로 지향해 나가야 할 근본 가치들을 조망한다. 그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동쪽 끝 한반도의 통일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그는 독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숙고하고 국민을 인도하면서 차분히 통일을 준비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당시 분단 동독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회주의통일당의 굳건한 저항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서독의 부자들도 결코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동독 건설을 위한 천문학적인 세금과 종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모든 인접국들은 근심 어린 시선으로 독일을 주시했다. 다시 통일된 뒤 예상되는 위협과 정치적 파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당시 동·서독 국내에선 통일보다는 다른 문제들이 더 시급하다고 여기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특히 동독 내부의 저항세력이 만만찮았다. 통일보다는 동독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독립국가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미국·영국 등 서방에서도 같은 저항이 있었다. 서독 중심의 유럽 동맹 및 대서양 동맹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 체제 내에서도 통일 반대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서로 일치하는 의견도 있었다. 예컨대 동·서독이 화합해서 유럽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과, 동독 사회를 인간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장벽을 허물고 바이츠제커는 대통령 재임기인 1990년 헬무트 콜 총리와 위대한 통일을 이뤄냈다. 바이츠제커는 특히 강조했다. 통일을 위한 과정에서는 정부 간 조약이나 통일 헌법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하나가 되려면 나눔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 교류 협력 확대, 법제도 정비, 통일 기금 조성을 위한 세제 도입 등 통일을 준비해나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누는 것을 배우고 이를 실천해나가는 성숙한 정치문화와 시민 의식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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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동·서독인들이 동서를 가르던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 장벽을 부수고 있다. 서독 중심의 통일을 준비한 지도자들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잘 유지해 마침내 통일을 성취했다. |
바이츠제커와 콜은 2+4 회담을 통해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와의 외교관계를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이를 통해 독일 통일은 주변국들과 쟁점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평화적인 절차 속에서 이뤄질 수 있었다.
바이츠제커는 “우리는 역사를 재촉해서도 안 되고 동시에 놓쳐서도 안 된다”고 했다. 독일 통일에 기여한 고르바초프는 “책임 있는 정치는 역사의 방향을 제때 인식하고 인도적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옮긴이 탁재택씨는 “독일의 경험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는 한반도 통일 과정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해나간다는 차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아울러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열강들과 함께 통일이라는 쟁점에 대해 순조롭게 소통하고 국가 관계를 생산적으로 조정 관리해나가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말했다.
책에는 새 시대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역사적 소명에 대한 경험들이 절절이 녹아 있다. 대선 직후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한 참모들이 일독할 만한 가치 있는 책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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