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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가짜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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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12-16 21:53:26 수정 : 2012-12-16 21: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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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었으나/ 기다리는 일은 오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내게 남은 몫이었으므로/ 그대가 내게 보낸 실핏줄 번져 흐르는 독약/ 지상에서의 마지막 고통이었으므로/ 우우우우/ 우울한 하늘 끝 목 긴 나무의 잎들/ (…)/ 소원 하나, 거둬주세요 이 완강한 그리움/ 저를 좀 풀어 주세요 네/ 비참해요 제발 좀 죽음인들요 네”(박남준, ‘지친 사람’)

누군가를 절박하게 기다리는 이가 있다. 그리움에 애가 타버린 그 우울이란,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독약처럼 고통스럽다. 목 긴 나무의 잎들은 물론이고 눈앞의 모든 풍경이 우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험하게 하소한다. 이 완강한 그리움에서 풀어달라고, 죽음인들 바치겠노라고.

정신과의사에게 이 사람은 분명 우울증 환자일 것이다. 그리움에 지친 이 사람, 만사가 귀찮고 수면 부족과 식욕 부진, 죄책감과 자기 비하에 시달릴 것이다.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이라는 병은 앓아보지 않는 사람은 모르는 아주 고통스러운 병이라고 입을 모은다. 극단적인 경우 자살에 이르게 하고 ‘묻지마 범죄’도 야기한다고 말한다.

통념과는 달리 미국 심리학자 에릭 메이젤은 최근 국내에 번역된 화제작 ‘가짜 우울’에서 우울증이란 편의상 만들어낸 병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극심한 슬픔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불행을 느끼는 감정을 우울증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윤이 많이 남는 이름짓기 게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행은 인간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공통경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울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할수록 그 말은 우리 사회를 더 불행으로 몰아간다고 우려한다. 뻔한 불행의 실체를 ‘우울’이라는 단어로 환치하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림으로써 약물에 의존하고 문제의 본질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얘기다.

자칫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오도할 위험도 배제할 수는 없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우울증이라는 개념의 포로가 되어 현실을 직시하면서 매순간 의미를 만들어가려는 자발적인 노력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시인의 저 그리움이 어디 알약으로 치유될 우울인가.

조용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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