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비협조로 ‘난관’… 각고 끝 시제품 탄생 우리 손으로 처음 조립한 전차 M48A3K.
그 과정은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고, 산업화 초기의 기술없는 설움과 이를 이겨낸 성공 스토리가 녹아있다. 미국은 한국이 전차를 조립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화의 첫발을 내디딘 아시아 최빈국의 무모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판단은 관련 시설과 기술, 전문인력 등 모든 면에서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에 기인했다.
미국에서 건너온 M48A1 전차가 부산에 도착한 뒤 자리 잡은 곳은 울산 현대조선소 부지에 있던 허름한 창고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변변한 연구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배를 만들던 현대조선에 전차 조립 사업을 맡긴 사연도 흥미롭다. 여기에는 방산업체를 지역적으로 분산해 전시에 대비하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전략이 담겨 있었다. 무기 관련 산업이 한곳에 모여 있으면 전시에 집중 공격을 받아 전쟁 수행 능력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냉전으로 남북 간 대치 국면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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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번째)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오른쪽 첫번째)과 함께 1978년 경남 창원에 있는 현대차량 공장을 방문해 M48A3K 전차 조립 라인을 시찰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그러나 미국에서 파견된 기술자들은 곧 퇴직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 코리아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나라였다. M48 전차를 앞에 두고 전차 조립에 강한 의지를 내보인 우리 연구원들과 미국에서 파견된 기술자의 의욕 차이는 컸다.
조립을 둘러싼 시련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주로 평지에서 작전을 폈던 미국 전차를 산악지형이 많은 한국에서 운용이 가능하도록 머리를 싸매야 했다.
노하우 전수를 꺼리는 미국 기술자들의 떨떠름한 태도 역시 걸림돌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으로 조립작업은 더디게 진행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뒤 미국에서 파견되는 지원 인력의 수준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연구진은 미국으로부터 전차 제작 노하우를 습득하는 한편, 조종장치와 계기판을 우리 장병의 체격 크기에 맞도록 자체 개량했다.
시행착오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당시 예산에서 알 수 있다. 첫 시제품 개발비로 현대와 조달본부 간 계약에서는 대당 1000만원(당시 기준)을 책정했지만 실제로 든 비용은 무려 4000만원에 달했다. 조립 및 개조 작업이 시작된 지 약 1년 만인 1977년 말 M48A3K 전차는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6·25전쟁의 아픈 기억을 딛고 우리 손으로 전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꾼 지 27년 만이었다.
안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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