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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20) 뉴욕 〈2〉 맨해튼 거리 산책

관련이슈 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입력 : 2012-11-14 21:57:04 수정 : 2012-11-14 21:5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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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방인들과 함께 즐기는 광장의 재즈공연
뉴욕서 맛보는 매콤한 쌀국수 맛에 행복감이…
오후의 햇빛이 초고층 빌딩 숲을 내리쬐고 있다. 섬은 섬 밖에서 바라볼 때 형상이 오롯이 잡히는 법, 섬 안에서는 그저 또 하나의 육지일 뿐. 내가 서 있는 곳은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지하철 역 지상 출구. 나는 방금 호보켄역에서 패스를 타고 허드슨강 밑을 통과해 맨해튼에 도착한 참이다. 바로 여기가 호보켄 출신의 프랭크 시나트라가 외친 ‘뉴욕, 뉴욕’이다.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와 월스트리트 사이에 86m 고딕식 첨탑으로 위엄을 지키고 있는 트리니티교회.
나는 이곳이 처음이 아니다. 2001년 9월11일 100층짜리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뒤 이곳은 한동안 땅 한가운데가 움푹 팬 공터였다. 철망으로 둘러싸인 채 공터는 누군가의 치부처럼 속속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장을 바라보는 데에는 어떤 용기가 필요했다. 이제 공터에는 9·11 추모박물관이 건립되었고, 그 옆에는 104층의 뉴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하고, 거리로 나선다.

“소문을 좀 내줘. 나 오늘 떠나. 뉴욕, 뉴욕의 일부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이곳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뉴욕,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폴 오스터의 뉴욕, 우디 앨런의 뉴욕이다.

“내 신발은 방랑자용, 뉴욕 한복판을 가로질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싶어.”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호보켄에 정착한 소방수의 아들. 호보켄의 이탈리안 식당 투타파스타에서 점심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을 때 마침 소방차가 일요일 낮의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갔고, 그때 마치 이웃 할아버지 이야기 전하듯 H가 알려준 사실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꿈꾸었던 뉴욕, 맨해튼의 거리를 바람 구두를 신은 방랑자의 걸음걸이로 걷는다.

뉴욕에서는 파리에서처럼 무작정 걷기로 한다. 딱히 목적지를 정할 필요가 없다. 그곳이 어디든 결국 도처가 목적지들이다. 목적지가 없지는 않다. 허드슨강을 건널 때마다 구역별로 두세 곳의 목적지를 계획하곤 한다. 예를 들면, 21세기 현대 예술의 메카인 모마(뉴욕현대미술관)에서 한나절을 보낸 뒤, 인근 세인트패트릭스교회와 5번 애비뉴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또는 지금처럼 월드트레이드센터역에 하차한 경우, 인근 트리니티교회에 들렀다가 길을 건너 월스트리트를 곧장 걸어 뉴욕만으로 이어지는 시포트(sea port)까지 내처 나아간다. 등대, 범선, 바다 냄새, 물결치는 생동감을 느끼고 싶다. 시포트에서는 언제든 브루클린 다리에 오르고야 만다. 서울과 파리와는 달리 뉴욕, 아니 맨해튼에는 다리가 많지 않다. 그러나 상징성이나 역사성, 곧 존재감으로 보자면 브루클린 다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21세기 현대 예술의 메카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
지난 며칠 동안 센트럴파크 옆 박물관 거리(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서 보냈다. 오늘은 분위기를 바꿔 그리니치 빌리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빌리지 뱅가드나 블루노트에 자리 잡고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재즈의 선율에 푹 빠져야겠다. ‘The best is yet to come!(최상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자신이 부른 이 노래 제목을 묘비명으로 삼았다. ‘The best is yet to come!(더 좋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 트럼펫 트리오의 화려한 금속성 선율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인간적인 목소리에 힘입어 발걸음이 한껏 경쾌해진다.

월스트리트 주변을 기웃거리며 배회한다. 브로드웨이로 접어들어 위로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한다. 소호를 지나 미 전역에서 재배한 식재료들을 선보이는 그린마켓으로 유명한 유니언 스퀘어까지 걷는다. 저녁엔 전설적인 재즈의 메카 블루노트가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로!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하는 아티스트 G의 추천에 의하면, 추억의 재즈를 위해서는 빌리지 뱅가드로, 밴드 공연을 위해서는 블루노트로 갈 것. 운이 좋으면, 허비 핸콕의 재즈 피아노가 이끄는 환상적인 재즈 연주를 만날 수도 있다. 트럼펫과 색소폰, 콘트라베이스와 드럼. 몇 년 전 블루노트에서의 황홀했던 순간을 나는 여전히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여흥을 못 이겨 다음날 악기점 거리로 유명한 타임스스퀘어 근처의 샘 애시를 찾아가기도 했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오후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맨해튼 거리를 걸을 땐 습관적으로 창공을 올려다본다. 나는 막 트리니티교회 뜰의 묘지를 지나는 중이다. 

트리니티교회 안뜰 묘지. 뉴욕 초기의 저명 인사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초고층 마천루 틈새에 자리 잡은 영원의 안식처. 붉은 사암 벽돌로 지어진 트리니티교회 첨탑이 주위 월스트리트의 회색 콘크리트 빌딩군 속에 위엄 있게 치솟아 있다. 나무 그늘 속 묘석들이 검푸른 이끼를 거느리며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딱히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맨 마지막 장을 읽을 때면 월스트리트와 마주하고 있는 트리니티교회의 이 안 뜰 묘지가 떠오른다.

“벽 밑에 웅크리고 무릎을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차가운 돌에 머리를 대고 있는 쇠약한 바틀비가 보였다. (중략) 절망하여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구제 없는 재난에 질식해 죽은 자들에게 희소식을 (중략)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필경사(筆耕士)란 복사기가 없던 시절 필사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 이 소설이 쓰인 1983년경은 맨해튼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월스트리트가 형성되어 미 전역으로 주식 거래가 확대되던 시점. 돈의 폭발적인 유통으로 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졌고, 그에 따라 서류 작성자로서의 서기 역할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그 일을 처리했다. 필경사 또는 필사원은 이 법률사무소 소속으로, 멜빌의 소설에 따르면 한 법률사무소에는 서너 명의 필경사가 고용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반드시 현실과는 다른 생각, 또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문제적 인물’. 필경사 바틀비에게 문제는 대인관계, 나아가 대사회적인 대응 방식이다.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하게 된 바틀비는 고용주인 변호사의 업무 지시에 동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소설의 화자이고, 소설의 주 내용인 바틀비라는 필경사의 언행을 관찰하고 전함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인물인 변호사의 말을 빌리면, 바틀비는 그가 삼십 년간 겪어온 수많은 별별 필경사들 중 가장 이상했던 인물이다. 처음 바틀비의 필경 업무 능력은 기대 이상의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그런데 만족감도 잠시 사흘째 되는 날부터 바틀비의 독특한 언행과 존재방식이 변호사의 주의를 끌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변호사가 업무 끝에 바틀비에게 자신과 함께 적은 양의 문서를 검증하자고 하자,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하겠다’ 또는 ‘안 하겠다’가 아닌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는 것! 영어 특유의 ‘부정(否定)의 화법’, 곧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뜻. 작가 허먼 멜빌은 자신이 소설 속에 부려놓은 이 한 문장이 21세기 문학과 철학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의 진원지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멜빌은 성서를 비롯한 인류가 남긴 걸작(인물의 형상이든 문장이든)들을 작품의 일부 또는 출발점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작가들이 평생 사로잡혀 고전하는 화두인 세상 그 무엇도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명제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멜빌식 대응인 셈이다.

바틀비에게 너무 사로잡혀 있던 탓에 신호등이 바뀌도록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서로 끝이 맞닿을 듯 치솟은 건물들 사이 제트기 한 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제트기가 지나간 자리에 한 문장이 선명하게 떠 있다. Time flies…. 화살처럼 날아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방금 흘려버린 프랭크 시나트라의 한 문장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응답하듯 귓전에 울린다. ‘최상의 것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자 그에 질세라 또 다른 문장이 공명하듯 귓전에 메아리친다. ‘우리에겐 오직 오늘만 있을 뿐!(No day but Today!)’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과 시한부 인생들이 지상의 방 한 칸을 위해 혼신의 열정을 불사르는 뮤지컬 ‘렌트(Rent)’의 시그널 문장이다. 우리 인생에서 일 년이란 어떻게 측정될 수 있을까. 1년을 분 단위로 쪼개면 52만5600분! 우리는 일 년을 살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일기 또는 모아놓은 영수증의 내역으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통화 내역으로 짐작해볼 수도 있다. 나에게 일년이 그 누군가에게는 십 년처럼 길 수도, 아니면 한 달, 하루처럼 순식간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의 속성이란 돌아볼수록 기묘해서, 일년이든 한 달이든, 또 하루든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한 순간이다. 시간의 화살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유니언스퀘어의 야외 재즈 공연. 이곳은 미 전역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파는 그린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뉴욕은 파리와 로마처럼 광장의 도시이자 21세기 첨단 공연예술의 현장. 세계적인 뮤지컬과 연극 공연장들이 맨해튼을 위아래로 길게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를 따라 즐비하다. 그런데 이들 실내 공연장만큼이나 내게 흥미로운 볼거리는 거리 풍경이다.

나는 종종 타임스스퀘어나 유니언스퀘어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좋아한다.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의상, 다양한 표정은 미술관에 전시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개성적이다. 광장에서는 늘 갖가지 퍼포먼스와 재즈 공연이 펼쳐진다. 낯선 이방인들과 함께 리듬을 타다가 문득 멀리에 있는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유니언스퀘어의 베트남&타이 전문음식점 리퍼블릭(Republic)의 스파이시 비프. 칠리고추 육수에 흰쌀국수, 쇠고기 약간, 숙주, 고수, 레몬 등이 어우러져 향긋하면서도 얼큰한 맛을 낸다.
맨해튼으로의 하루 여행이 며칠째인가. 남쪽 워싱턴으로, 또 북쪽 보스턴으로 한 번씩 멀리 다녀올 때마다 돌아갈 날을 세어본다. 뜬금없이 얼큰한 육개장 국물 생각이 간절해진다. 맨해튼에서의 육개장이라니! 매콤한 향초가 듬뿍 들어간 베트남 쌀국수집을 알고 있다.

유니언스퀘어 37번지의 ‘리퍼블릭(Republic)’. 이곳은 파리 13구의 소문난 중국&베트남 쌀국수집인 ‘트리코탱(tricotin)’이나 ‘포14(Pho14)’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니언스퀘어 근방에서는 뉴요커들이 즐겨 찾는 베트남&타이 전문음식점이다. 리퍼블릭에서 내가 선택한 메뉴는 스파이시 비프(Spicy beef). 베트남 고추로 맛을 낸 얼큰한 육수에 흰쌀국수, 쇠고기 약간, 숙주, 쪽파, 방울 양파채, 그리고 향기가 풍부한 고수(cilantro)와 레몬. 국물까지 깨끗이 비워내자 거침없이 밤하늘로 울려퍼지는 트럼펫 소리만큼이나 속이 얼얼하고 시원하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블루노트로 가기 위한 재즈풍의 성장(盛粧)만이 남았다. 그리니치 가는 길, 시나트라의 정감 어린 목소리가 귀에서 속삭인다. 더 좋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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