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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팔라우 강제징용자 절반 ‘불귀의 객’

입력 : 2012-11-06 18:37:10 수정 : 2012-11-06 18: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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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지원위 진상조사 결과 “일은 하지도 못하고 피란만 다니다 간신히 살아왔지.”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지만 60년도 넘은 일을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날의 ‘공포’는 그대로 전해졌다.

1944년 5월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필리핀 남동쪽 ‘팔라우’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한 변성식(88·가명)씨. 그는 2007년 정부 조사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미군의 공습을 받아 죽다 살아났고 섬에 도착해서도 미군 공습 때문에 도망 다니기 바빴다”며 “그 과정에서 같이 갔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태평양전쟁 때 남양군도를 비롯한 남방지역으로 강제동원됐다가 사망한 한인 노무자들의 실체가 뒤늦게 드러났다. 그동안 전체적인 동원규모나 사망인원에 대한 추정치조차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로나마 밝혀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6일 내놓은 ‘남양청 동원 노무자 진상조사 결과’에 따르면 1944년 팔라우로 끌려간 한인 노무자 334명 중 151명(45.2%)이 현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양청은 남양군도를 담당한 일본의 식민통치 기구다.

일제강점기 한인 노무자를 남양군도로 실어날랐던 수송선 ‘오사카호’의 조난해몰자 명부. 강제동원됐던 한인의 실체를 밝히는 단서가 됐다.
사망자 151명 중 1명은 수송선 ‘오사카호’를 타고 가다가 질병으로 숨졌고 항해 중간에 수송선이 미군 잠수함 공격에 격침되면서 27명이 사망했다. 나머지 123명은 목적지에 도착해 공습이나 교전, 질병,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남양청은 사망자 처리의 책임이 있었으나 조위금을 지급한 인원은 53명뿐이었다. 군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무자의 처리는 군에서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위원회는 전했다.

팔라우는 일본이 제1차대전 승리 후 위임통치권을 얻은 곳으로 남양군도 통치의 중심지였다. 해군이 주둔하면서 군사기지 개발을 위해 더 많은 노무자가 필요해진 일본은 남양청을 통해 1939년 368명을 동원했다. 이후 1941년을 제외하고 매년 500명에 이르는 한인을 강제로 데려갔다.

위원회는 남양청이 남긴 문서 등에서 노무자들에게 한 번도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확인했다. 전쟁이 끝난 뒤 노무자 귀국에 대한 아무 조치가 없어 노무자들이 직접 미군과 교섭까지 한 사실도 드러났다.

위원회 조사2과 김명환 팀장은 “사이판, 오키나와 등 전쟁 말기 다른 격전지에 동원된 이들도 팔라우처럼 명부만 확보한다면 비슷한 사망률을 나타낼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사망자 관련 기록과 유골 정보를 한국 측에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오현태 기자 sht9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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