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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⑫프랑스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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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7-08 21:43:33 수정 : 2012-07-08 21: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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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처럼 박힌 반 고흐의 흔적들… 론강엔 별이 빛난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아를로 향하는 아침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카뮈의 아름다운 산문 ‘알제의 여름’의 첫 문장이다. ‘우리가 어떤 도시와 주고받는 사랑은 흔히 은밀한 사랑이다.’ 어떤 도시, 카뮈는 파리나 프라하, 피렌체 같은 도시들을 어떤 도시로 예를 들었는데, 나는 파리나 프라하, 피렌체 같은 예술의 성소(聖所)들의 목록에 아를을 포함시키기를 좋아한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무대 론강. 반 고흐가 화구를 앞에 놓고 구도를 잡은 곳에서 본 풍경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를은 화가 반 고흐의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조금 더 문학적으로 들여다보면 아를은 알퐁스 도데의 소설무대로도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반 고흐와 도데는 동명의 작품을 남겼다. ‘아를의 여인’이 그것이다. 그런데 동명의 이 두 작품은 ‘아를’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고 내용은 서로 관계가 없다. 반 고흐 그림의 주인공은 단골 카페의 중년 여주인이고, 도데 소설의 여인은 주인공 장이 상사병으로 죽게 하는 치명적인 존재, 집시이다. 이 집시 여인은 정작 소설에는 단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 그저 풍문으로만 전한다. 과거 고대 로마에 이어 아를을 지배했던 스페인의 전통이 문맥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도데의 소설을 각색한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가 그것이다. 아를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사랑을 받는 것일까.

“방앗간에서 내려와 마을로 가려면 길가에, 팽나무를 심은 넓은 뜰 안쪽에 서 있는 농가 앞을 지나게 됩니다.” 이것은 도데의 소설 ‘아를의 여인’의 첫 문장이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문청들에게 도데의 아름다운 단편 ‘아를의 여인’을 천천히 낭독해 주곤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공명하면서 청자가 집중하는 것은 장이라는 청년이 떠돌이 집시 여자에 대한 상사병으로 죽는 ‘사건’의 서사적 맥락이지만, 그와 더불어 음미하는 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세부적인 묘사에 등장하는 프로방스 스타일의 마을 구성과 가옥구조, 즉 인간과 환경이 빚어내는 ‘정경(情景)’이다.

“집은 진짜 프로방스 지방의 지주 저택으로, 빨간 기와지붕 꼭대기에는 바람개비가 달렸으며, 갈색을 띤 넓은 정면에는 일정하지 않은 크기의 창이 났습니다. 그리고 건초를 걷어올리는 활차와 불쑥 비어져 나온 건초 몇 단이 눈에 띕니다.”(알퐁스 도데 ‘아를의 여인’)

저물 녘의 아레나, 고대 로마 원형극장 유적. 아레나를 빙 돌아 프로방스 특유의 빨간 기와지붕의 집들이 에워싸고 있다.
독자는 이 짧은 단편에서 아를의 정체성, 나아가 소설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팽나무, 빨간 기와지붕, 바람개비, 활차(滑車), 건초, 그리고 포석 깐 마당…. 아를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아를과 아를 사람들을 화폭에 담은 반 고흐 덕분에, 아를은 가보지 않고도 누구에게나 정겹게 다가온다. 반 고흐의 시선에 포착되고 구현된 색과 선과 형상들에 매혹된 영혼이라면, 알퐁스 도데의 짧은 단편들에 묘사된 아를을 통해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 날에는 배낭을 메고 훌쩍 그곳으로 떠나기까지 한다.

프로방스의 파란 하늘과 태양, 사방에 흐르는 향초들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게 되면, 피터 메일이란 영국의 잘나가는 광고인의 경우처럼, 아예 그곳 농가를 구입해 일 년을 살아보는 짜릿한 용기를 내기도 한다(피터 메일의 경험을 담은 ‘프로방스에서 보낸 1년’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잔의 고장 엑상프로방스에서 반 고흐의 공간 아를까지 자동차로 50분, 시내로 진입하자 오래전 아를에 처음 왔던 어느 여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비뇽 세계연극축제에 파리의 연극인들과 어울려 밤낮없이 연극을 보다가 지중해안의 세트라는 작은 항구를 향했다. 일주일 가까운 남프랑스 여행 계획에 아를은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아를은 아를이었다. 어떻게 아를을 그냥 지나친단 말인가. 일찍이 작은 로마로 불리며 프로방스의 보석처럼 빛나는 작으나 고고하고 아름다운 아를을.

르 바렘, 나무가 우거진 입구. 외양은 평범하지만 고대 로마 석조 벽감과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한 아파트호텔이다.
기차가 론강을 건너 아를역에 정차하자,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내리고 말았다. 아를이라는 푯말에 적힌 알파벳과 작고 단아한 아를역의 모습에 홀린 것이다. 기차는 떠나고, 덩그러니 아를역 플랫폼에 남은 나는 그제야 그날 도착해야 했던 목적지가 생각이 났다. 떠난 기차를 다시 붙잡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천천히 아를의 역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를에서의 이틀이 꿈같이 펼쳐졌다.

역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라마르틴 광장 가의 카발르리 문을 통해 도심으로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짐을 부려놓을 숙소를 찾았다. 성수기라 빈 숙소가 없었다. 아레나 옆 골목골목 발품을 판 뒤 ‘오텔 뒤 뮈제(박물관호텔)’의 2층 방을 잡았다. 체류하던 파리나, 잠시잠시 떠나곤 했던 마드리드·암스테르담·피렌체 등지에서 여행의 중심이 박물관이었던 시절이었다. 반 고흐라는 표상을 한꺼풀 벗겨내면 아를은 로마의 통치를 받던 곳이자 훗날 잠시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고대 로마의 유적과 스페인의 풍습이 그대로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극장 아레나와 4월이면 대대적으로 열리는 투우축제가 그것이었다.

반 고흐가 수감생활을 했고 그림으로 그렸던 아를시립병원. 현재는 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를은 나와 매우 긴밀한 곳이기도 했다. 떠나오기 전 나는 아를에 있는 악트쉬드출판사에서 발행한 레이몽 장의 베스트셀러 ‘책 읽어주는 여자’의 한국 편집자였다. 반 고흐도 고흐려니와 뜻밖의 아를 여행에서 나를 감동시킨 것은 론강 옆에 있는 악트쉬드출판사를 예기치 않게 방문한 것이었다. 악트쉬드(Actesud)는 예술의 고도(古都)답게 사진·문학·미학 책들을 전문으로 발행하는 종합출판사로 1층엔 서점, 그 위는 출판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악트쉬드사에서 나는 그 여름 프랑스 전역을 뜨겁게 달궜던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을 구입했고, 그것은 이후 지중해 여행 내내 나와 동행했다.

론 강변의 아를에서는 어디를 가나 반 고흐의 행적과 만난다.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이 있지만, 그리고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그의 걸작들이 전시되고 있지만, 이곳 아를은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반 고흐 박물관’으로 불러도 될 만큼 그의 흔적이 별처럼 박혀 있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 아를 여행에는 일행이 있었다. 불문학자와 문청, 그리고 소년. 아를에 처음 온 문청과 소년은 아를 고유의 유적과 반 고흐의 족적을 두 발로 답사하고, 나는 해질녘과 이른 아침 아를을 산책하며 끼니 때에는 아를의 신선한 음식재료로 부엌에서 간단 요리를 하고, 또 아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맛보며 아를과 내밀하게 소통할 것이었다.

르 바렘 레스토랑, 예술의 도시 아를의 색채와 디자인을 구현한 프로방스 요리 전문식당. 아를 근처 야생 습지 카마르그의 흑소등심스테이크가 인상적인 곳이다.
아를에서 묵을 숙소는 포럼 광장 옆의 ‘르 바렘’. 광장 가에는 ‘밤의 카페’라는 작품의 무대인 ‘카페 반 고흐’가 있었다. 르 바렘은 아를 및 프로방스 지방의 특별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과 함께 ‘끌레바캉스’라는 체인 형태의 아파트호텔이었다. 집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위치를 뻔히 알면서도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들을 빙빙 돌아야 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아파트가 아니라 레스토랑이었다. 주소를 확인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직원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분주했다. 식탁 중앙에 놓은 커다란 유리 화병과 가득 꽂힌 붉은 장미, 벽마다 걸린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후각에 감도는 음식 냄새….

늘 하던 대로 한 시간여 골목 식당들 메뉴 순례를 하며 한 곳을 정해 들어가던 방식을 접고 아를에서의 점심은 이곳으로 결정했다. 빨간 장미꽃이 꽂힌 식탁 옆에 잠시 감상에 빠져 서 있던 나를 발견한 청년이 상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우처를 내밀자 그는 어떤 체크인 절차도 밟지 않고 따라오라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밖에 안 되는 짧은 골목을 빠져나가 이어지는 골목의 어느 한 집 앞에 섰다. 겉으로는 여느 골목에서 볼 수 있는 4층짜리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청년이 열쇠로 문을 열어준 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발 한 발 실내를 돌아보며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고대 로마양식에 현대적인 스타일의 질료와 색채, 조명의 조화. 처음 아를에 홀렸던 것처럼, 나는 단번에 그곳을 사랑하고 말았다.

지중해와 아를 사이 천연 야생 습지 초원 카마르그의 흑소 등심스테이크. 카마르그 산 꽃소금과 뤼베롱 산간 고원에서 자란 포도주로 밑간을 했다.
레스토랑 르 바렘의 특별요리는 카마르그의 흑소등심스테이크. 카마르그는 아를과 지중해 사이에 광대하게 펼쳐진 천연 야생 습지로 바다 거품처럼 흰 백마와 태양의 흑점처럼 검은 소, 그리고 지중해 바다의 짠맛과 햇빛으로 빚어진 소금, 일명 꽃소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곳의 소금 제조는 약간의 햇빛에 이른 아침 이루어진다. 생태적인 흐름을 따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최적의 순간에 결정시킴으로써 하나의 작품으로 비유되었다. 뤼베롱 산간 고원마을에서 자란 포도로 생산한 레드 와인과 카마르그 꽃소금으로 밑간을 한 흑소등심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은밀한 향이, 카뮈가 사랑한 도시들의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으로 미각을 일깨웠다. 동시에 지중해로 가는 길, 거대하게 펼쳐진 습지의 초원을 거니는 백마와 홍학, 그리고 그들 사이에 점점이 박힌 검은 소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일 나는 카뮈가 묻혀 있는 루르마랭으로 갈 것인가, 카마르그로 갈 것인가. 내일의 행로는 내일에!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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