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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무대 론강. 반 고흐가 화구를 앞에 놓고 구도를 잡은 곳에서 본 풍경이다. |
“방앗간에서 내려와 마을로 가려면 길가에, 팽나무를 심은 넓은 뜰 안쪽에 서 있는 농가 앞을 지나게 됩니다.” 이것은 도데의 소설 ‘아를의 여인’의 첫 문장이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문청들에게 도데의 아름다운 단편 ‘아를의 여인’을 천천히 낭독해 주곤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공명하면서 청자가 집중하는 것은 장이라는 청년이 떠돌이 집시 여자에 대한 상사병으로 죽는 ‘사건’의 서사적 맥락이지만, 그와 더불어 음미하는 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세부적인 묘사에 등장하는 프로방스 스타일의 마을 구성과 가옥구조, 즉 인간과 환경이 빚어내는 ‘정경(情景)’이다.
“집은 진짜 프로방스 지방의 지주 저택으로, 빨간 기와지붕 꼭대기에는 바람개비가 달렸으며, 갈색을 띤 넓은 정면에는 일정하지 않은 크기의 창이 났습니다. 그리고 건초를 걷어올리는 활차와 불쑥 비어져 나온 건초 몇 단이 눈에 띕니다.”(알퐁스 도데 ‘아를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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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녘의 아레나, 고대 로마 원형극장 유적. 아레나를 빙 돌아 프로방스 특유의 빨간 기와지붕의 집들이 에워싸고 있다. |
프로방스의 파란 하늘과 태양, 사방에 흐르는 향초들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게 되면, 피터 메일이란 영국의 잘나가는 광고인의 경우처럼, 아예 그곳 농가를 구입해 일 년을 살아보는 짜릿한 용기를 내기도 한다(피터 메일의 경험을 담은 ‘프로방스에서 보낸 1년’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잔의 고장 엑상프로방스에서 반 고흐의 공간 아를까지 자동차로 50분, 시내로 진입하자 오래전 아를에 처음 왔던 어느 여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비뇽 세계연극축제에 파리의 연극인들과 어울려 밤낮없이 연극을 보다가 지중해안의 세트라는 작은 항구를 향했다. 일주일 가까운 남프랑스 여행 계획에 아를은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아를은 아를이었다. 어떻게 아를을 그냥 지나친단 말인가. 일찍이 작은 로마로 불리며 프로방스의 보석처럼 빛나는 작으나 고고하고 아름다운 아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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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바렘, 나무가 우거진 입구. 외양은 평범하지만 고대 로마 석조 벽감과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한 아파트호텔이다. |
역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라마르틴 광장 가의 카발르리 문을 통해 도심으로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짐을 부려놓을 숙소를 찾았다. 성수기라 빈 숙소가 없었다. 아레나 옆 골목골목 발품을 판 뒤 ‘오텔 뒤 뮈제(박물관호텔)’의 2층 방을 잡았다. 체류하던 파리나, 잠시잠시 떠나곤 했던 마드리드·암스테르담·피렌체 등지에서 여행의 중심이 박물관이었던 시절이었다. 반 고흐라는 표상을 한꺼풀 벗겨내면 아를은 로마의 통치를 받던 곳이자 훗날 잠시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고대 로마의 유적과 스페인의 풍습이 그대로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극장 아레나와 4월이면 대대적으로 열리는 투우축제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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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가 수감생활을 했고 그림으로 그렸던 아를시립병원. 현재는 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
론 강변의 아를에서는 어디를 가나 반 고흐의 행적과 만난다.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이 있지만, 그리고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그의 걸작들이 전시되고 있지만, 이곳 아를은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반 고흐 박물관’으로 불러도 될 만큼 그의 흔적이 별처럼 박혀 있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 아를 여행에는 일행이 있었다. 불문학자와 문청, 그리고 소년. 아를에 처음 온 문청과 소년은 아를 고유의 유적과 반 고흐의 족적을 두 발로 답사하고, 나는 해질녘과 이른 아침 아를을 산책하며 끼니 때에는 아를의 신선한 음식재료로 부엌에서 간단 요리를 하고, 또 아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맛보며 아를과 내밀하게 소통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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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바렘 레스토랑, 예술의 도시 아를의 색채와 디자인을 구현한 프로방스 요리 전문식당. 아를 근처 야생 습지 카마르그의 흑소등심스테이크가 인상적인 곳이다. |
늘 하던 대로 한 시간여 골목 식당들 메뉴 순례를 하며 한 곳을 정해 들어가던 방식을 접고 아를에서의 점심은 이곳으로 결정했다. 빨간 장미꽃이 꽂힌 식탁 옆에 잠시 감상에 빠져 서 있던 나를 발견한 청년이 상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우처를 내밀자 그는 어떤 체크인 절차도 밟지 않고 따라오라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밖에 안 되는 짧은 골목을 빠져나가 이어지는 골목의 어느 한 집 앞에 섰다. 겉으로는 여느 골목에서 볼 수 있는 4층짜리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청년이 열쇠로 문을 열어준 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발 한 발 실내를 돌아보며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고대 로마양식에 현대적인 스타일의 질료와 색채, 조명의 조화. 처음 아를에 홀렸던 것처럼, 나는 단번에 그곳을 사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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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와 아를 사이 천연 야생 습지 초원 카마르그의 흑소 등심스테이크. 카마르그 산 꽃소금과 뤼베롱 산간 고원에서 자란 포도주로 밑간을 했다. |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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