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⑪ 엑상프로방스의 생선요리 부이야베스

관련이슈 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입력 : 2012-06-24 21:38:59 수정 : 2012-06-24 21:38:59

인쇄 메일 url 공유 - +

팔다남은 생선으로 만든 섞어찌개
한국 매운탕과 달리 담백·구수한 맛
홍합탕과 함께 지중해 음식 진미 뽐내
쪽빛 바다 물결이 아름다운 니스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레몬의 도시 망통을 거쳐 국경 너머 이탈리아 음악의 도시 산레모까지, 또 니스에서 서쪽으로 또 북쪽으로 칸을 거쳐 그라스, 엑상프로방스까지, 앙리 코마샤스의 매끄러운 남저음이 동행했다. 그의 ‘어린 시절의 프랑스’를 들으면, 열어 놓은 창문으로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바람처럼, 꽉 닫혔던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창문이 활짝 열리는 자유로운 기분이 된다.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지중해와 경계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태어난 프랑스는 올리브 나무 아래 평화로이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코마샤스의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마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처럼 쪽빛 하늘에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사실 그는 프랑스가 아닌 프랑스 변방,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이다. 스페인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알제리에서 태어난 혼혈 샹송 가수이다.

칸에서 엑상프로방스로 향하는 A8 고속도로에서 포착한 생 빅투아르 산. 화가 세잔이 늘 바라보며 화제(畵題)로 삼던 산이다.
19세기 말 이민 장려 정책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알제리로 건너갔고, 프랑스인과 스페인인 또는 프랑스인과 터키인 등 혼혈 이민 가족이 탄생하게 된다. 코마샤스처럼 이러한 알제리의 혼혈 가정 출신으로 프랑스가 자랑하는 작가 알베르 카뮈가 있다. 카뮈 역시 프랑스인 아버지와 스페인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알제리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카뮈 문학의 자양분은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과 바다, 그리고 돌과 향기로운 꽃들. 알제리 음색의 코마샤스의 샹송을 듣자니, 엑상프로방스 지척의 뤼베롱 산간 고원마을 루르마랭에 묻혀 있는 카뮈 생각이 간절해진다.

중세 이전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술의 보고인 생 소뵈르 성당. 세잔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다.
출발지 칸에서 엑상프로방스까지는 사십 분 정도 소요된다. 노선은 프랑스 남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A8과 A9번 고속도로. 도로표지판의 맨 위에는 바르셀로나, 내처 대여섯 시간 달려가면 피레네산맥 넘어 카탈루니아의 주도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바로셀로나, 스페인 축구의 정상 바르셀로나이다. 그대로 달리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이 언제부터인지 전방 우측 멀리에서 기다리듯 서 있는 생 빅투아르 산에 눈길이 닿자 질주 욕망은 깜짝 봄눈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인가. 엑상프로방스의 상징인 샤를 드골 광장의 로통드(원형) 분수대와 거기에서 이어지는 쿠르 미라보(미라보 가로수 길), 그 사이 구시가지 골목 입구에 있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호텔과 그 옆 이름을 잊었지만 부이야베스를 맛보았던 그날 밤의 황홀은 잊은 적이 없었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는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코트다쥐르 지방의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로, 프랑스에서 지성과 예술, 그리고 맛의 중심지이다. 엑상프로방스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프로방스에서도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샘(泉)을 가리킨다. 도시명 앞에 엑스가 붙으면 물이 풍부하고 좋은 온천지대를 일컫는다. 엑상프로방스에는 백여 개의 샘과 분수가 곳곳에서 청량한 물소리를 낸다. 엑상프로방스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물 좋기로 이름난 곳은 론-알프스 지방의 온천 휴양지 엑스레뱅(Aix-les-bains·뱅은 목욕이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엑스라는 접두어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원형경기장(아레나)을 심장처럼 품고 있는 이웃 아를만큼은 아니지만 곳곳에 로마의 유산이 공기나 토양, 혈육에 희미하게 배어 있다.

산과 바다의 맛이 어울어진 프로방스식 부이야베스. 선창에서 어부들이 팔다 남은 생선으로 끓인 잡어탕이다.
엑상프로방스가 고향인 화가 세잔은 이탈리아 이민 가족 출신이다. 모자제조업에 종사하던 조부모가 가난을 못 이겨 가족을 이끌고 엑스로 왔고, 부친은 은행업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고압적인 사업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세잔은 부친의 희망에 따라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프로방스의 다채로운 색감에 매혹되어 끝내 법학을 포기하고 중학교 동창생 에밀 졸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파리에서 독학으로 화업을 이루었다. 엑상프로방스를 찾는 이의 대부분은 바로 근대 회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이 폴 세잔의 족적을 쫓기 위해서이다. 작지만 깊이 있는 공간답게 소소하게 하루 여행을 도모하는 즐거움이 크다.

도심 외곽 숲속에 세잔이 그림을 그리고 말년을 보낸 아틀리에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아틀리에 뒤편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멀리 ‘생 빅투아르 산’이 눈에 들어온다. 아를이나 생레미 프로방스가 반 고흐의 무대라면,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의 태생지이자 화제(畵題)의 공간이다. 이 아틀리에는 작품보다는 생가 및 아틀리에로서의 역할이고, 작품은 파리나 뉴욕·런던에 가 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엑상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의미는 아틀리에나 화폭이 아닌 ‘생 빅투아르’라는 현장이다.

매번 세잔을 찾아갔던가. 나는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엑상프로방스를 방문했다. 한 번은 마르세유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역을 통해 발을 들여놓았고, 또 한 번은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질주해 도시로 진입했다. 처음 엑상프로방스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명성에 비해 작고 소박한 규모의 역과 도심의 명물인 미라보 거리의 웅장한 플라타너스 길과 그 울울하고 대단한 플라타너스 이파리들 속에서 맹렬하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였다. 파리에서 마르세유에 이르는 A7 고속도로는 태양의 도로라고 일컬을 만큼 프로방스의 여름은 태양의 제국이다. 그 중심 엑상프로방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워서 느지막이 덧창이 열리는 파리나 다른 휴양지들의 아침과는 달리 이른 시간에 일과가 시작된다.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음식은 주로 여름철 요리. 그중에는 아이올리와 부이야베스가 있다. 아이올리는 마늘과 레몬주스·올리브유로 만든 소스이고, 부이야베스는 손질한 갖가지 생선을 올리브유와 마늘·양파·허브를 넣고 끓인 탕이다. 원래 부이야베스는 어부들이 팔다 남은 생선으로 만든 섞어찌개에서 유래한다.

세잔의 아틀리에. 구시가지 북쪽 레 로브 언덕에 있고 도심에서 걸어서 이십 여분 걸린다.
내가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이야베스를 맛보게 된 것은 순전히 동행했던 선배 시인 덕분이었다. 십여년 전, 2000년 여름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북서부 브르타뉴와 중서부 루아르 고성 지대, 그리고 중부 아비뇽과 남부 코트다쥐르에 이르기까지, 우정으로 여정을 이끌었던 나에게 평소 말수 적은 성품의 시인은 서툰 발음으로 부이야베스를 언급했다. 나는 즉시 그에 맞춰 부이야베스가 생선 메뉴에 특별히 강조된 프로방스식 전통 식당이 우리가 머무르는 호텔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저녁 정찬 예약을 했다. 선배 부부와 나는 저녁에 맛볼 부이야베스에 잔뜩 기대를 품고 느린 걸음으로 세잔과 졸라가 다녔던 중학교와 중세 이전에 건립된 아름다운 생 소뵈르 성당을 둘러보았다. 오후에는 도심을 벗어나 세잔의 아틀리에까지 걸어가 일이층을 오르내리고, 아틀리에 정원 끝까지 세잔의 발걸음으로 사색하며 걷다가, 내처 아틀리에 뒤쪽 이차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 생 빅투아르 산의 형세까지 관망하고 난 뒤 다시 도심으로 돌아왔다. 서머타임제로 오후 10시가 되어야 어둠이 깃드는 남프랑스의 여름은 오후 8시30분이 되어야 식사가 시작된다. 유럽, 특히 여름 시즌 프랑스에서의 저녁식사는 어디를 가든 축제의 흥취를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여름이 되기 전부터 내가 유럽으로 떠날 계획을 잡는 것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만끽할 수 없는 여행지만의 자유롭고도 향기로운 축제 분위기, 그로 인해 한껏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마음 상태를 갈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십여년 만에 다시 찾은 엑상프로방스. 처음에는 옛 시가지 사람들의 발길이 새벽까지 이어지는 식당 골목 초입에 프랑스라는 이름의 호텔에서 묵었으나, 이번에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저택 지역에 있는 플로리디안느라는 레지던스를 구했다. 저택을 개조한 콘도형 숙소이므로 이른 아침 미라보 거리를 기점으로 골목골목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통시장이 열리는 것으로 알려진 리쉐름 광장에 들러 프로방스 전역에서 도착한 신선한 과일과 양치즈, 그리고 막 구워낸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한아름 사 안고 돌아와 아침상을 차릴 생각이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곧장 저녁식사를 위해 옛 식당을 찾아갔다. 화덕은 그 자리 그대로 빨간 불꽃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으나, 실내 디자인은 도시적으로 모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그 집을 지나쳐 골목을 몇 번 오갔고, 문을 열고 들어가 화덕을 확인한 후에야 그때 그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부이야베스 요리를 찾아 구도심의 좁고 오래된 골목길을 탐색했고, 생 소뵈르 성당 근처 식당에서 프로방스식 부이야베스를 주문할 수 있었다.

부이야베스가 마르세유의 잡어탕 또는 매운탕이라고 불리지만, 한국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토마토 잘게 으깬 것과 마늘·양파·샤프란·회향풀을 넣고 오랫동안 은근히 끓여 향기롭고 구수한 국물맛을 내는 것이다. 마르세유가 아닌 엑상프로방스에서 맛본 부이야베스는 토마토를 으깨 넣어 걸죽하게 하는 대신 샤프란을 넣은 생선 육수에 파프리카와 양파·레몬을 얹은 맑고 담백한 맛이다. 곁들이는 와인으로는 알프스 계곡에서 발원한 론강의 물줄기로 자란 포도로 제조한 코트 뒤 론(cotes du Rhone) 화이트 와인. 따끈한 부이야베스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렬한 프로방스의 향초들이 말라가며 내는 건조하고 깊은 향기가 콧속을 휘돌며 국물과 함께 온몸에 스며드는 듯했다. 다시 한 숟가락 국물을 뜨는데, 내일은 프로방스를 사랑했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년을 보내며 찍었던 들판으로 나가 봐야지,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들었다. 90년 넘는 평생 동안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는 고작 2편, 그것도 마지막 초상은 그림자였다.

‘프로방스’라는 제목의 그 사진은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 때 자신의 그림자를 함께 촬영’한 것으로 일명 ‘그림자 초상화’. 그러고 보니, 썩 괜찮은 생각이었다. 세잔과 부이야베스, 그리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엑상프로방스의 밤이 깊어갔다.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채수빈 '여신 미모'
  • 채수빈 '여신 미모'
  • 아일릿 원희 '여신 미모'
  • 아일릿 민주 '매력적인 눈빛'
  • 다솜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