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매운탕과 달리 담백·구수한 맛
홍합탕과 함께 지중해 음식 진미 뽐내 쪽빛 바다 물결이 아름다운 니스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레몬의 도시 망통을 거쳐 국경 너머 이탈리아 음악의 도시 산레모까지, 또 니스에서 서쪽으로 또 북쪽으로 칸을 거쳐 그라스, 엑상프로방스까지, 앙리 코마샤스의 매끄러운 남저음이 동행했다. 그의 ‘어린 시절의 프랑스’를 들으면, 열어 놓은 창문으로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바람처럼, 꽉 닫혔던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창문이 활짝 열리는 자유로운 기분이 된다.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지중해와 경계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태어난 프랑스는 올리브 나무 아래 평화로이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코마샤스의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마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처럼 쪽빛 하늘에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사실 그는 프랑스가 아닌 프랑스 변방,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이다. 스페인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알제리에서 태어난 혼혈 샹송 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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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엑상프로방스로 향하는 A8 고속도로에서 포착한 생 빅투아르 산. 화가 세잔이 늘 바라보며 화제(畵題)로 삼던 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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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전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술의 보고인 생 소뵈르 성당. 세잔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다. |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는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코트다쥐르 지방의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로, 프랑스에서 지성과 예술, 그리고 맛의 중심지이다. 엑상프로방스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프로방스에서도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샘(泉)을 가리킨다. 도시명 앞에 엑스가 붙으면 물이 풍부하고 좋은 온천지대를 일컫는다. 엑상프로방스에는 백여 개의 샘과 분수가 곳곳에서 청량한 물소리를 낸다. 엑상프로방스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물 좋기로 이름난 곳은 론-알프스 지방의 온천 휴양지 엑스레뱅(Aix-les-bains·뱅은 목욕이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엑스라는 접두어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원형경기장(아레나)을 심장처럼 품고 있는 이웃 아를만큼은 아니지만 곳곳에 로마의 유산이 공기나 토양, 혈육에 희미하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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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의 맛이 어울어진 프로방스식 부이야베스. 선창에서 어부들이 팔다 남은 생선으로 끓인 잡어탕이다. |
도심 외곽 숲속에 세잔이 그림을 그리고 말년을 보낸 아틀리에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아틀리에 뒤편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멀리 ‘생 빅투아르 산’이 눈에 들어온다. 아를이나 생레미 프로방스가 반 고흐의 무대라면,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의 태생지이자 화제(畵題)의 공간이다. 이 아틀리에는 작품보다는 생가 및 아틀리에로서의 역할이고, 작품은 파리나 뉴욕·런던에 가 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엑상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의미는 아틀리에나 화폭이 아닌 ‘생 빅투아르’라는 현장이다.
매번 세잔을 찾아갔던가. 나는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엑상프로방스를 방문했다. 한 번은 마르세유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역을 통해 발을 들여놓았고, 또 한 번은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질주해 도시로 진입했다. 처음 엑상프로방스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명성에 비해 작고 소박한 규모의 역과 도심의 명물인 미라보 거리의 웅장한 플라타너스 길과 그 울울하고 대단한 플라타너스 이파리들 속에서 맹렬하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였다. 파리에서 마르세유에 이르는 A7 고속도로는 태양의 도로라고 일컬을 만큼 프로방스의 여름은 태양의 제국이다. 그 중심 엑상프로방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워서 느지막이 덧창이 열리는 파리나 다른 휴양지들의 아침과는 달리 이른 시간에 일과가 시작된다.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음식은 주로 여름철 요리. 그중에는 아이올리와 부이야베스가 있다. 아이올리는 마늘과 레몬주스·올리브유로 만든 소스이고, 부이야베스는 손질한 갖가지 생선을 올리브유와 마늘·양파·허브를 넣고 끓인 탕이다. 원래 부이야베스는 어부들이 팔다 남은 생선으로 만든 섞어찌개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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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아틀리에. 구시가지 북쪽 레 로브 언덕에 있고 도심에서 걸어서 이십 여분 걸린다. |
십여년 만에 다시 찾은 엑상프로방스. 처음에는 옛 시가지 사람들의 발길이 새벽까지 이어지는 식당 골목 초입에 프랑스라는 이름의 호텔에서 묵었으나, 이번에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저택 지역에 있는 플로리디안느라는 레지던스를 구했다. 저택을 개조한 콘도형 숙소이므로 이른 아침 미라보 거리를 기점으로 골목골목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통시장이 열리는 것으로 알려진 리쉐름 광장에 들러 프로방스 전역에서 도착한 신선한 과일과 양치즈, 그리고 막 구워낸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한아름 사 안고 돌아와 아침상을 차릴 생각이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곧장 저녁식사를 위해 옛 식당을 찾아갔다. 화덕은 그 자리 그대로 빨간 불꽃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으나, 실내 디자인은 도시적으로 모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그 집을 지나쳐 골목을 몇 번 오갔고, 문을 열고 들어가 화덕을 확인한 후에야 그때 그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부이야베스 요리를 찾아 구도심의 좁고 오래된 골목길을 탐색했고, 생 소뵈르 성당 근처 식당에서 프로방스식 부이야베스를 주문할 수 있었다.
부이야베스가 마르세유의 잡어탕 또는 매운탕이라고 불리지만, 한국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토마토 잘게 으깬 것과 마늘·양파·샤프란·회향풀을 넣고 오랫동안 은근히 끓여 향기롭고 구수한 국물맛을 내는 것이다. 마르세유가 아닌 엑상프로방스에서 맛본 부이야베스는 토마토를 으깨 넣어 걸죽하게 하는 대신 샤프란을 넣은 생선 육수에 파프리카와 양파·레몬을 얹은 맑고 담백한 맛이다. 곁들이는 와인으로는 알프스 계곡에서 발원한 론강의 물줄기로 자란 포도로 제조한 코트 뒤 론(cotes du Rhone) 화이트 와인. 따끈한 부이야베스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렬한 프로방스의 향초들이 말라가며 내는 건조하고 깊은 향기가 콧속을 휘돌며 국물과 함께 온몸에 스며드는 듯했다. 다시 한 숟가락 국물을 뜨는데, 내일은 프로방스를 사랑했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년을 보내며 찍었던 들판으로 나가 봐야지,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들었다. 90년 넘는 평생 동안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는 고작 2편, 그것도 마지막 초상은 그림자였다.
‘프로방스’라는 제목의 그 사진은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 때 자신의 그림자를 함께 촬영’한 것으로 일명 ‘그림자 초상화’. 그러고 보니, 썩 괜찮은 생각이었다. 세잔과 부이야베스, 그리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엑상프로방스의 밤이 깊어갔다.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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