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⑩프랑스 루아르강변의 고성지대 소뮈르

관련이슈 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입력 : 2012-06-10 22:41:17 수정 : 2012-06-10 22:41:17

인쇄 메일 url 공유 - +

루비빛 와인과 푸아그라… 루아르강변서 맛보는 황홀함 프랑스 동부 요새 도시 브장송에서 아침 열 시경에 출발해 프랑스 중서부 소뮈르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다.

브장송과 소뮈르 간의 거리는 약 500㎞. 파리를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라디오는 ‘프랑스 퀼튀르’(문화)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간 소개와 명작 기행, 작가 인터뷰 중간중간 샹송이 흘러나왔다. 그중 한 노래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사르트르가 극찬한 음성, 줄리에트 그레코였다. 노래는 ‘사랑한다고 말해줘요(parlez moi d’amour)’. 피아노 반주만으로 음송하듯 속삭이는 그레코의 감미로운 음성은 귓속에 들어오는 즉시 증발해 버리듯 담백했다. 노래가 전하는 내용인 즉, ‘환상이 없다면, 인생이란 너무 씁쓸한 것. 말해 줘요, 사랑한다고. 그 말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자꾸 듣고 싶다’는 것.

줄리에트 그레코가 들려주는 간절한 사랑 노래에 감염되어, 기타만으로 속삭이듯 음송하는 카를라 브루니의 시디를 카스테레오에 넣었다.

그녀가 대통령의 아내가 되기 전 프랑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던 노래는 제1집 표제곡 ‘누군가 내게 말하길(quel’un qui m’a dit)’.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듣고 흥얼거리며 진전되면서 줄어드는 거리감을 즐겼다. 노래가 전하는 내용인즉, ‘삶은 별거 아니라더군요, 한순간 빠르게 시들어가는 장미와 같이 스쳐지나가 버린다구요. 흘러가는 시간은 고약한 녀석, 우리의 슬픔으로 외투를 만든다구요. 하지만 누군가 내게 말하길, 당신이 아직 날 사랑한다는군요. 그게 가능한가요?’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의 소뮈르성.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카를라 브루니의 허스키한 음성에 실려 자동차는 오를레앙과 투르를 지나 어느덧 루아르 강변으로 들어섰다.

마을을 잇는 다리를 중심으로 강 양쪽 둑에는 수십 개의 깃발이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잿빛 허공을 가르며 도열하고 있는 색색의 깃발들은 이 마을이 중세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형국이었다.

성(城)은 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의 위쪽 기슭에 백색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성의 이름은 소뮈르(Saumur), 마을의 이름도 그와 같았다. 그러니까 형형색색의 다양한 깃발들은 이 소뮈르성을 비롯해 소뮈르 인근의 또다른 성주들의 가문(家紋)을 드높여주는 것이었다. 중세기에는 봉건 계급의 표지로, 현대에는 자본, 곧 와인 산지로서의 홍보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소뮈르성이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강의 이름은 루아르이다. 루아르강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 청춘시절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 이 강줄기를 따라 달리기도 했고 숨바꼭질하듯 넘나들기도 했다.

루아르강은 프랑스 중부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길이가 장장 1000㎞가 넘는, 프랑스에서 제일 긴 강으로 기록되고 있다. 강을 따라 아름다운 숲들이 펼쳐져 있고, 크고 작은 고성(古城)들이 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성은 숨은 듯 은밀한 정취를 거느리고 있고, 어느 성은 호령하듯 당당한 품격을 자랑하고 있다. 루아르강을 중심으로 한 고성 여행은 소뮈르 인근의 투르(Tours)가 거점지이다.

파리가 수도로 정해지기 전까지 프랑스의 중심지는 투르였다. 투르와 루아르강, 그리고 루아르강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땅, 그 토양에 자라는 포도나무, 그 포도나무 열매로 생산하는 와인,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샤토(城, chateaux). 원래 샤토 중의 샤토는 왕의 영역, 왕의 가족들, 곧 공작과 백작 등등이 성주로 군림하는 세계. 투르를 중심으로 루아르 강변의 80여개의 샤토들은 이곳이 파리 이전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음을 말해준다.

소뮈르성 아래 안느 당제 호텔의 뜰과 소뮈르식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메네스트렐’(환하게 불이 켜진 곳).
실제 이 시기 프랑스의 왕들은 즉위식을 대주교가 있는 투르의 생 가티엥 대성당에서 거행했고, 자연히 왕들은 투르를 중심으로 정무를 수행하고, 휴식과 여가를 즐겼다. 이처럼 루아르강 양안의 성들은 사용 목적에 따라 크기와 외양, 속내가 다르게 조성되었다. 프랑수아 1세가 정무를 보았던 앙부아즈성은 루아르 강변 언덕에 위풍당당 서 있는데, 군더더기 없이 남성적인 선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여섯 귀부인의 성’이라 불리는 슈농소성은 울창한 숲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귀부인의 우아함과 격조를 특징으로 한다.

파리 몽파르나스 TGV역에서 보르도행 초고속열차를 타면 투르까지 1시간10분 소요된다. 처음 유럽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에펠탑보다도 국경들을 건너지르는 철길과 그 위를 달리는 국제열차들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종류의 프랑스 여행법 중의 하나는 투르와 인근 루아르 고성지대의 하루 코스, 또는 같은 시간대에 왕복 가능한 렌느와 인근 몽생미셀의 하루 코스 등이 있다.

어느 성을 목적지로 하든 늘 열차를 이용하곤 했는데, 지난 몇 년간은 자동차로 투르를 지나 블루아와 앙브와즈에 들렀다. 대서양 연안의 항구 보르도나 피레네 국경지대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식이었다. 루아르 지역 특유의 상쾌한 와인과 정통 크레프를 요리를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투르를 향해 열차를 탈 때면 소뮈르를 꿈꾸었다. 그러나 앙브와즈성이나 슈농소성, 그리고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샹보르성 등 여러 차례 고성지대를 여행하면서도 소뮈르에는 선뜻 가 닿지 못했다. 소뮈르를 찾는 발길은, 와인 찬미자들의 다양한 품종의 포도밭과 그에 따른 카브(cave·포도주 저장 동굴) 순례와 함께 울창한 가로수길을 달리는 자전거로 레이서들, 또는 아주 가끔 나처럼 발자크의 소설무대를 쫓아다니는 소설 옹호자들이다. 식도락과 양조학의 루아르 지방은 세계 예술사에서 창조자의 반열에 올라 있는 위대한 소설가 발자크의 태생지로 ‘골짜기의 백합’, ‘으제니 그랑데’ 등의 소설무대이다. 특히 ‘으제니 그랑데’는 소뮈르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는 듯이 생생하게 담고 있다. 

고혹적인 루비빛에 사랑스러운 딸기향의 소뮈르 레드 와인. 중세풍의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마셔야 제맛이 난다.
소뮈르성 바로 아래 루아르 강변 둑길에 있는 안느 당제 호텔(Hotel Anne d’Anger)에 여장을 풀고, 호텔 뒤 오르막길을 걸어 성으로 올라갔다. 수확기인 구월을 향해 포도알이 알알이 익어가는 언덕의 포도밭을 지나 해자(垓字)를 건너 성으로 들어갔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고, 성벽에 내걸린 깃발들이 기세 좋게 펄럭였다. 성 안팎은 자정에 있을 ‘소리와 빛의 축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성을 한 바퀴 돌아 ‘소뮈르 읍내 위쪽으로 난, 성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의 맨 끝에 자리 잡은 집’을 찾아 내리막길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 집은 발자크의 소설 ‘으제니 그랑데’의 그랑데 영감의 집, 곧 소설 주인공 으제니의 집이었다. 나폴레옹이 검으로 세계를 제패하려고 했다면, 발자크는 펜으로 소설의 제국을 건설하려던 야망의 사나이였다. 그런데 그의 소설 속 세상이란 거창함보다는 소뮈르처럼 소읍에 살고 있는 그랑데라는 포도주 통장수로 자수성가한 수전노와 그의 외동딸의 별것 아닌 인생사에 집요하리만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으제니 그랑데’를 읽는 것은 소뮈르의 소소한 일상과 한 집안에 흐르는 지루하리만치 세밀하고 방대한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으제니의 집 근처 골목을 배회하다 강변으로 내려왔다. 브장송에서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벌써부터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성으로 오르기 전에 숙소인 호텔 별채에 있는 메네스트렐(중세 음유시인)이라는 레스토랑에 소뮈르식 저녁식사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사실 오늘날 호텔로 사용하지만 소뮈르성의 ‘부속 건물’(성관). 25년 동안 예술가 정신으로 미식 개발을 해온 메네스트렐은 호텔(저택)의 안뜰 구석에 딸린 건물로 일반 여행자들의 발길을 피하듯 조금 떨어져 있는데, 일단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세풍의 골격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융합한 매우 세련된 실내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줄기차게 루아르 강변의 고성지대를 찾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으뜸은 와인, 곧 가장 프랑스적인 미각을 추구하는 요리이다. 

대리석 문양의 테린(몇 가지 재료를 다져 틀에 넣고 차갑게 식혀 얇게 잘라낸 것)으로 만든 푸아그라와 무화과잼, 파슬리 샐러드로 구성된 전채요리 ‘앙트레’.
셀 수도 없이 많은 포도주 샤토들과 동굴들, 그리고 크레프(crepe·밀전병처럼 얇게 부친 뒤 안에 꿀이나 잼, 뉴텔라 초코 등을 넣어 먹는 프랑스 전통 간식류)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로 거위간을 응결시킨 푸아그라와 미각뿐만 아니라 시각을 황홀하게 해주는 연골요리들과 디저트들. 소뮈르 한복판 루아르강 둑에 도열해 펄럭이는 깃발들처럼 소뮈르 와인의 명성은 세상에 자자하다. 나는 특히 고혹적인 루비빛이 감도는 딸기향의 소뮈르 레드 와인 애호가이다.

소뮈르에서의 저녁식사를 위해 나는 점심도 거른 채 브장송에서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저녁식사는 대리석 문양의 푸아그라에 무화과즙으로 조리한 젤스타일의 소스, 파슬리 샐러드를 앙트레로 정하고, 루아르강에 서식하는 생선과 그 강물을 젖줄로 재배한 호박·가지·당근·파프리카 꼬지를 메인으로 선택했다.

루아르강에 서식하는 생선과 그 강물을 젖줄로 재배한 토마토·가지·호박·파프리카 꼬지.
아주 작게 푸아그라 한 점 떼어 입에 넣으니 입 안 가득 거위 간과 버터가 어우러진 농후한 맛이 혀끝에서부터 목젖까지 자욱히 퍼져나간다. 푸아그라 특유의 부드럽고 기름진 느낌을 완화시키기 위해 뒤끝이 상큼한 소뮈르 로제 와인 한 모금 머금고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뜰 한가운데, 연녹색 반짝이는 이파리의 보리수나무 옆에는 곧 달처럼 둥근 조명이 켜질 것이고, 자정에는 천 년 세월을 휘감은 채 잠자고 있는 고성의 지붕 위로 순간순간 찬란하게 불꽃이 터질 것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지금 이 순간 소뮈르식 저녁식사의 황홀이 있다.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앳하트 서현 '여신 미모'
  • 앳하트 서현 '여신 미모'
  • 엄정화 '반가운 인사'
  • 이엘 '완벽한 미모'
  • 조여정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