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오베는 열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은 신화 속 어머니 이름이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남편 암피온은 자살했고, 아내는 돌이 되어버렸다. 생때같은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의 시신을 목도한 어머니에게 ‘애도’라는 단어는 사치스럽다. 돌이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엄청난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문학에 나타난 그리움의 방식들을 담은 ‘애도 예찬’이라는 책에서 지은이 왕은철 교수는 “슬픔은 때로 사람을 돌로 만들지만, 돌도 눈물을 흘린다”면서 “이것이 애도의 본질이요 윤리”라고 말한다. 그는 “어쩌면 진정한 애도는 프로이트가 처방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벽장’ 속에 고스란히, 죽어서도 여전히 낯설고 신비로운 남으로 고스란히 남겨두는 것일지 모른다”고 피력한다.
오늘은 국가에서 지정한 ‘애도의 날’이다. 사실 국가가 아니라 어떤 개인이라도 애도를 강제할 수는 없다. 강요한다고 쉽게 생기는 감정도 아니다. 그렇지만 창졸간에 고혼이 된 어느 아들, 돌이 된 어미의 울음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자는 날이다. 추모 사이렌이 울릴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그들은 적어도 지금 살아있는 누군가의 가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가 죽었다. 오늘도 ‘애도는 없고 휴일만 부각된 부끄러운 현충일’이라는 저녁뉴스를 보게 될까.
조용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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