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발음은 어눌했고 가끔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말하고자하는 바는 분명했다.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청각장애인 1호 배우’로 잘 알려진 김도진(22·청각장애 2급·사진)씨를 17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씨는 선천적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큰 소리만 들린다. 어려운 말은 메모지를 이용해 필답으로 질문과 답변을 교환했다. 그는 처음 인터뷰를 하자 “부탁할 게 있다”며 작은 메모지를 내밀었다. “억지 감동은 싫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장애인 기사들은 대부분 ‘인간승리’라는 식인데, 그런 기사들이 오히려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의 입 모양을 봐야 하는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된 건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어릴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로 종종 모델 일을 하고 단편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전문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던 친구가 이상하게 그려진 사람을 보며 무심코 “장애인 같다”는 말을 했다. 그는 “일반 중학교에 다녔는데 선생님들도 ‘잘 안 들리는 도진이도 이만큼 하는데, 도진이보다 못한 사람은 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에 올린 글이 순식간에 높은 조회수를 자랑하면서 언론에까지 소개됐다. 이후 ‘팬’들이 생겼다.
“제가 수련회에 가서 춤을 추거나 하면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란 말을 했어요. 대중매체에선 장애인들이 동정심을 유발하는 존재들로만 표현되는데, 대중매체를 바꾸려면 제가 그곳에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2010년, 잡지에서 그의 사진을 본 김조광수 감독의 연락이 왔고, 그렇게 ‘사랑은 100℃’라는 작품의 주연배우가 됐다.
그러나 배우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이 한정되어 있고, 어떤 감독은 그에게 ‘일회용 배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꿈을 잃지는 않았다. 특히 몇 년 전 미국의 청각장애인 대학교에 방문해 연기학과 학생들을 만난 것은 큰 자극이 됐다. 그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수화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며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로부터 ‘한국에는 청각장애인 배우가 없으니 네 역할이 크다’는 말을 듣고 꼭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만능 엔터테이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작사를 하거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그의 글에는 항상 청각장애인이 등장한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외국인을 만나면 ‘보디랭귀지’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데, 정작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장애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춤을 추든, 연기를 하든, 시나리오를 쓰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싶다. 언젠가 청각장애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라며 웃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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