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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희의 사진에세이] ⑦ 내 사는 곳은 꽃피는 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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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24 18:22:56 수정 : 2013-01-24 18: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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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비친 하늘에서 피어오른 연초록 파문은 자연의 묵시
살구꽃이 활짝 피었다.

내 사는 산골 마을에 꽃들이 앞다투어 피기 시작하더니 이제 봄이 흐드러진다. 요 며칠 완연한 봄기운을 받더니 꽃 대궐이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겨울이 길고 추워 봄이 더디게 오는가 싶더니 올해도 제비가 집 처마 밑에 날아와 작년에 쓰던 보금자리를 다시 보수한다고 바쁘다. 텃밭에 심은 감자는 싹이 움트기 시작했고 상추, 시금치, 열무, 배추들은 연한 새순을 올리고 지난달 내내 가지치기를 한 살구나무가 분홍색 꽃봉오리를 터뜨리니 뒤뜰과 연결된 과수원은 온통 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집 주위의 하얀 민들레와 제비꽃들은 제 식구 늘리기에 바쁘고 냉이도 이젠 하얀 꽃대를 한껏 올리고 있다. 씁쓰름한 머위는 밭두렁을 온통 뒤덮고 집 울타리의 두릅 속살은 살짝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다.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눈 닿는 곳마다 터지는 꽃들을 보며 마냥 걷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그냥 걷는 길 주변에는 여린 쑥, 씀바귀, 고들빼기, 달래 같은 먹거리가 흔하다. 시골생활의 별미가 돼주는 것들이다. 살아 있는 것들이 모두 봄이다. 긴 겨울을 보내고 그 자리에 변함없이 다시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먼저 봄이 와야 한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봄은 제각기라 하지 않았던가.

물속에 담긴 하늘과 그 하늘에서 피어 오른 연록의 파문은 자연의 묵시다.
시간과 일에 묶여 살아가는 삶을 접고 자연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고픈 마음은 비단 예술하는 사람들만의 꿈은 아닐 것이다. 도회지 직장인의 로망이기도 하다.

일찍이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읊었다. 무한경쟁에 내몰려 관계성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자연적 삶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자연은 모두를 품는 관계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소박하게 농사지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 내는 일상이 얼마나 정겨운가. 내게 산골의 삶이 주는 기쁨이다. 내겐 이제 시골은 더 이상 기억 속의 고향이 아니다.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계시지만 봄꽃 환하게 피는 이 계절에 저승꽃 같은 주름 깊은 얼굴과 평생 농사일로 쭉정이 같이 되어 버린 몸들이지만 반백 년 넘는 세월을 이곳에 시집와 살고 있다. 이제는 경로당 뜨끈한 방에 노곤해진 관절 풀며 둘러앉은 할미꽃. 자식들은 봉숭아 씨앗처럼 터져 도시로 나가고 언제나 당산나무 같았던 영감도 서둘러 세상 떠난 지 오래지만 남은 할미꽃들 서로 보며 괜찮은 봄날을 보내고 있다.

이 산골에 들어와 대문 열어 놓고 산 지 벌써 다섯 해, 흙과 씨름하며 경험 많은 장모님께 여쭤가며 절기에 맞게 씨앗 뿌리며 세월을 배우고 있다.

꽃길을 따라 호젓한 봄을 내 발 끝에 밟고 간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정성스럽게 장을 담갔다. 이곳에 살면서 제일 중요한 일 중에 하나다. 좋은 메주와 산 속에서 내려 오는 맑은 물과 항아리 가득 담기는 햇살이 장맛을 향기롭게 한다. 어릴 적 집에 장 담그는 날이면 구수한 메주콩으로 배를 불리며 좋아했던 추억과 엄마가 장독대 앞에서 늘 정화수 떠 놓고 빌고 또 빌던 모습이 겹쳐진다. 집안 식구들의 건강과 무사고를 기원하셨다.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하여도 집안에 큰일을 앞두거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당산나무나 장독대에 정화수 떠 놓고 비손하였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들을 위해 뜨거운 물 한 바가지도 함부로 마당에 쏟아 버리지 않으셨다. 그 어느 곳보다도 정갈하게 씻고 닦았던 여자들만 접근할 수 있는 성소(聖所)였다. 천지신명과도 소통할 수 있는 신성한 곳이었다. 장독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그 집안 살림이 넉넉한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장을 담그며 장모님께서 옛 얘기를 하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 가면 어린 아들은 한 짐 나무를 지고 ‘어무이’ 하며 사립문을 들어서고, 어머니는 저녁밥을 짓다가 부엌문을 활짝 열고 달려 나와 아들을 맞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피었는지, 아들은 세상을 짊어지고 온 양 어깨를 활짝 폈다. 나는 그 시간 그 세월을 만나고 있었다. 마중한 만큼 배웅하였던 지나온 시간들. 아직 덜 피어난 꽃은 지려고 저리 애써 오고 우리 인생도 비운 자리엔 다시 채우려 들고 나는 바람을 꺾었을 뿐 꽃을 꺾지는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하며 기다리던 세월의 길은 내 젊은 시간을 데리고 내가 보지 못하는 휘어진 길을 따라 가고 있다. 중년의 나의 봄은 도처에 아쉬움만 슬어놓는다.

지금 내 곁에 함께 가는 이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면서 세상과 아름다움을 소통할 수 있을까. 이곳 산골, 봄이 오는 길목에 늦은 눈이 내렸다. 눈이 그친 뒤 하얀 눈이 소복 쌓인 방문 밖의 소리를 들었다. 밤 짐승 오는 소리가 아닌 처마 끝에서 눈이 녹아 내리는 소리였다. 마당에 나가 한참 동안 그 똑똑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눈 녹는 소리에서 추억을 들었다. 거기 처마 밑엔 어린 내가 친구들과 서서 눈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처마가 만든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 다정한 마음들이 넘치는 골목들은 그 시절 키를 넘는 폭설에도 외롭지만은 않았다. 누군가 홀로 눈을 치우느라 고생하지도 않았다. 그 처마 아래서 세상은 결코 혼자 사는 고독한 곳이 아닌, 혼자일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처마가 없는 아파트엔 안길 수 있는 푸근한 그 무엇이 없다. 그 속에서 숙명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되어갈 뿐이다. 서로를 힘들어하며 이 세상의 눈 쌓인 골목길들을 걸어 가는 것이다.

앞산의 봄은 시린 가슴에 닿는 가녀린 흔들림처럼 곱다.
긴 겨울 동안 혼절한 듯 제 색을 잃고 있던 만물에 화색이 돌 때면, 봄은 진정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하계에 끌려간 딸 ‘페르세포네’를 되찾은 환희와 소생의 계절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미는 연둣빛 새싹에 반색을 하며 들뜨게 되는 것은 다채로운 생명의 소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그의 대표적 장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했다. ‘라일락 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우는’ 4월보다 그의 말처럼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 주던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의 따뜻한 손길 같은 봄볕이 우리에게 말한다. 칩거하고 싶은 마음과 일상에서 벗어나 저 봄볕 속으로 한 걸음 나설 때 자연과의 소통은 시작된다고. 그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나누고 소통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이다. 봄만큼 많은 사랑과 찬사를 받는 계절이 있을까?

꽃 향기 수런대는 산골마을엔 새벽이 일찍 온다. 밤새 숲의 봄 향기가 머문 푸른 길을 걸으면 나 또한 그만큼 푸르러지는 것 같다. 풀잎에 맺힌 이슬에 바짓가랑이 적시는 오솔길을 따라 고라니, 산토끼가 물을 마시고 가는 산속 저수지에 이르면 지저귀는 새소리와 저수지 물속에 내려앉은 파란 하늘이 물안개 속에 피어 오른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즐기며 걷는 숲길은 사철 어느 때나 지친 마음을 내려 놓게 한다. 사람 없는 숲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과 온갖 여린 나무들과 풀들이 봄봄거리며 하늘로 밀어 올리고 숲엔 연록이 번진다. 지고의 아름다움이 넘쳐나고 있는 자연의 갤러리에서 땅 위의 작품들을 나는 매일 만난다. 무수한 세월을 두고 형성된 대자연의 공간이 미의 원형이다.

봄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 보내는 것이다. 낙엽은 봄날 떨어지는 꽃잎만큼 강렬할 수 없다. 낙엽이 자연스러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그린다면 낙화는 마음을 저미게 한다. 봄날의 시린 가슴은 개화와 낙화의 시공간 속에도 있다. 매화는 지고 목련은 터지며 우리네 마음속 봄날도 간다. 천상병 시인의 노래처럼 잠시 쉬어 가는 이승의 나들이, 감미로운 봄이 마음을 달뜨게 한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금이 지금이라 했던가.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무한한 자연의 심상을 만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 복잡한 공간을 벗어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 내 사는 곳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을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유를 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소풍가방이 간편할수록 소풍은 즐겁다. 늘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잊고 사는 사람,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영원토록 곁에 있어줄 그 오랜 사랑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사랑한다. 나눌 수 있는 행복한 꽃을 피워 자연과 이웃에게 날마다 선물하고 싶다.

지난가을 추락했던 모든 것은 다시 이 봄날의 푸르른 생명들을 들어 올리며 한껏 상승하고 있다. 내 자리와 내 꿈이 여기서 이렇게 옹송거린다고 생각하니 나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변방살이를 하는 중이라는 행복한 사실이 가슴속에서부터 시원하게 불어 온다. 이제 햇살은 더 따뜻해지고 바람은 더 훈훈해질 것이고 세상은 살맛 나는 일들로 그득해지는 언제나 봄날이었으면 좋겠다.

평상에 앉아 소쩍새 우는 봄밤을 듣는다. 봄밤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셋… 어느새 하얗게 우리 집 마당에 내려앉는다. 우리가 마음의 고향을 떠나며 잃어 버린 꿈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

원덕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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