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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⑪ 선양 유적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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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4-18 18:10:07 수정 : 2012-04-18 23: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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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벌판의 심장… 뛰어난 만주족 지도자들 淸제국 기틀 다진 곳
선양(瀋陽)은 우리가 만주 벌판 혹은 요동 벌판이라 부르고 중국이 동북평원이라 부르는 곳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선양은 2011년 기준으로 인구가 819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동북지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고 중국 전체로는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이 같은 선양이 본격적으로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드러낸 것은 청나라 때부터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努爾哈赤)가 1625년 랴오양(遼陽)에서 선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다. 이후 선양은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수도의 명칭을 성경(盛京)으로 바꾸고 대청제국 건설을 정력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역사적 대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내가 선양이란 도시의 이름을 처음으로 기억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지파(支派)의 종손이었던 할아버지는 가끔 선조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는데, 그중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자 충격적으로 기억된 분은 삼학사 어른이었다.

홍익한(洪翼漢)이란 이름을 가진 그분은 나라를 위해서, 대의명분을 위해서 오랑캐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양으로 끌려갔다고 이야기했다. 선양으로 끌려간 후 펄펄 끓는 기름가마 앞에서 항복과 죽음의 선택을 강요당했을 때 삼학사 어른은 망설임 없이 기름가마에 몸을 던졌다고 할아버지는 이야기했다. 그 후 나에게 펄펄 끓는 기름가마 속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가는 선조 어른의 모습은 몸서리치는 공포의 기억이면서 장엄한 인간의지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선양은 나에게 그런 기억과 관련된 장소였다.

선양고궁.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에 있는 청나라 초기의 궁으로 1636년 완공되었다. 중앙에 있는 건물은 황제와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던 대정전이고, 대정전 앞에 좌우로 각각 5동의 정각이 있는데 이를 십왕정이라 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병자호란과 관련된 시조를 배웠다. 효종이 지었다는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다 초하구(草河口) 어디메오/ 호풍(胡風)도 차도찰사 궂은 비는 무삼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다 님 계신 데 보낼꼬”라는 시조를 배웠고, 김상헌(金尙憲)이 지었다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를 배웠다.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그것들은 우리 선조가 국난을 당해 선양으로 끌려가면서도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에서는 털끝만큼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증거였다. 그러한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의 자세를 가진 선조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증거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역사의 실상을 접하면서 나의 그런 자부심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온갖 추태와 비현실적 발상을 알게 되면서 참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효종의 시조에서는 왕자의 신분으로 한겨울에 머나먼 선양으로 끌려가는 사람의 실존적 고통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김상헌의 시조에서는 죄인이 되어 적국의 수도로 끌려가는 사람의 회한과 불안함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초개인적인 우국충정의 문제는 갈수록 미심쩍어지기 시작했다.

요동백탑(遼東白塔). 랴오닝성 랴오양시 서쪽에 있는 8각 13층의 전축첨탑.
나는 1991년 연행사들의 여행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선양을 처음으로 찾았다. 그 이후 이런저런 일로 다시 선양을 찾은 횟수가 아마도 10여 차례는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선양을 향한 내 발걸음이 풍경을 즐기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선양을 향한 나의 발걸음은 한가롭게 풍경을 즐기는 여행자의 발걸음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의 무거운 발걸음이 되곤 했었다. 그것은 과거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E H 카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생각하는 이유이다. 선양을 찾으며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현재의 한미 관계, 한중 관계, 남북 관계에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주장과 혼란스러운 행태들이 겹쳐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선양역 기념비. 동북지역을 해방한 소련군을 기념하기 위해 탱크탑을 세웠다.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紫禁城)을 본 사람에게 선양의 고궁(故宮)은 낯선 느낌을 준다. 선양 고궁은 촌스럽고 소박하다는 느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떠돌이가 사는 비항구적인 거주공간이라는 이미지도 강하게 풍긴다. 이를테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은 촌스럽고 소박하다는 느낌을 주고, 정무를 처리하는 공간은 떠돌이가 가는 곳이란 느낌을 강하게 준다. 선양 고궁의 핵심적 건물인 대정전(大政殿)과 그 앞에 유목민족의 파오처럼 줄지어 늘어선 십왕정(十王亭)이 그런 떠돌이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주는 이유는 이렇다.

선양 고궁을 처음 짓기 시작한 사람은 유목민족의 칸이었던 누르하치이며, 이곳에서 제국의 기틀을 다지면서 천자의 위상을 추가한 사람은 황타이지이고, 이곳을 떠나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거처를 옮겨 천자의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한 사람은 순치제(順治帝)이다. 선양의 고궁은 이처럼 유목민족의 추장에게서 제국의 황제로 바뀌는 모습을 건축양식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인 십왕전은 청나라의 초기 황제가 절대권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협의체 대표의 자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동북평원. 면적이 약 35만㎢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평야. 수수와 옥수수가 주요 농작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복궁보다도 훨씬 초라한 이 궁궐에서 거대한 청제국의 밑그림이 만들어진 원동력은 무엇일까? 인구 100만명 정도에 불과한 만주족이 중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청제국을 건설하고 수백년 동안 안정적 통치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크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렇게 신하의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하고 그 표시로 말의 피를 마시는 치욕스러운 의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마냥 통분해 할 것만이 아니라 마땅히 이와 같은 반성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청나라의 초·중기 지도자는 모두가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금수와 같은 오랑캐, 문화와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 파악 능력과 과감한 결단력과 정력적인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뜻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중화의 표본으로 명을 흠모하고 청을 경멸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북릉. 청나라 2대 황제인 청태종과 황후의 능으로 소릉(昭陵)이라고도 한다.
명과 청이 나라의 흥망을 걸고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금수처럼 행동한 사람들은 명나라의 지도자들이었다. 평안도 코앞에 있는 가도에 주둔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탐욕스러운 요구를 한 것은 바로 명나라 수군의 지휘자였던 모문룡(毛文龍)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명을 중화로 생각하고 청을 오랑캐로 생각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누르하치를 오랑캐의 추장쯤으로 생각하며 조선 왕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꺼렸지만 사실 그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강인한 의지와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운 사람이었고, 한족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통해 민족 통일에 대한 갈망을 키운 사람이었다. 전장에서는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명군을 격파하며 연전연승한 전략가였고, 정치가로서는 협의체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인 팔기를 창설한 사람이었다. 또 민족적으로는 몽고와의 대등한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한 사람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만주문자를 만들어 만주족의 형성을 촉진한 사람이었다.

나는 누르하치가 죽인 동생과 맏아들의 무덤을 요양에서 보면서 그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선양의 동릉(東陵)에서 누르하치의 생애를 생각하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대통령 친인척의 행태를 떠올리며 생각을 바꾸었다.

청태종 초상. 청태종 황타이지는 내몽골을 평정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얻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쳤다.
북릉(北陵)에 묻혀 있는 청태종 황타이지는 두 차례 호란으로 우리 민족에게 지워지지 않는 치욕을 안겨준 사람이며 수십만명의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아가서 여자는 첩으로 남자는 노예로 만든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무덤을 찾아가는 나는 머릿속에서 그런 침략자의 이미지를 당시의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여러 차례 침입을 자초하는 도발적 행태를 보였다는 사실로 애써 상쇄시켰다. 그러면서 청나라 역사 ‘태종본기’에 적혀 있는 “문무에 능했으며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정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용병술은 신기에 가까워 가는 곳마다 승전보를 울렸다”라는 구절을 곱씹어 보았다. 사람들은 청나라 황제 중 치적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강희제와 건륭제를 꼽지만, 나는 그들 두 사람보다 태종 황타이지의 업적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태종의 업적이 더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태종 황타이지는 누르하치가 한족을 가혹한 노역에 동원하고 함부로 살육했던 것과는 달리 한족을 제국 건설의 동반자로 껴안았다. 범문정(范文程)을 차별 없이 대신의 자리에서 일하게 하고 항장인 홍승주(洪承疇)를 포용해서 중용하는 데에서 볼 수 있듯, 만주족 귀족과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족을 적극 등용함으로써 만주족, 몽골족, 한족의 연합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점은 당시 명나라가 많은 인재가 있었으면서도 환관과 탐관오리가 발호하며 그들을 박해한 사실,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이 베이징을 먼저 점령하고 자금성을 차지했으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인재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사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식인과 정치지도자들은 병자호란 때나 지금이나 왜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 청나라와 가까이하는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소득 없는 명분론과 정파의 이해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선양의 유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구한말의 의병에까지 이어진 우리의 이 도저한 관념적 명분론을 냉정한 현실적 판단으로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홍정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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