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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 <34>불교와 차의 황금기 ① 선과 차의 황금기 문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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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4-09 17:49:57 수정 : 2012-04-13 13: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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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 혜심, 선화일미 심화
광활한 우주상대로 선의 깨달음을 다도나 차락에 연결
“중국화된 불교, 고려적인 토양과 관점에서 재해석 노력”
신라 말 중국에서 불어온 남종 간화선(看話禪)의 바람은 거셌다. 신라는 선종에 관한 한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았다. 차라리 신라의 유학승들은 중국 전역에서 그 명성을 높이고 중국 불교계를 이끌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화상이라 불린 무상선사나 김교각 스님이라 불린 지장보살 등 ‘김’(金)씨 속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스님뿐 아니라 중국에서 이름을 드날린 승려를 세면 수십 명에 이른다. 당나라 유학 열풍으로 국내 선불교의 수준은 자연스럽게 중국과 대등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유학을 가지 않아도 국내 공부만으로도 훌륭한 선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진각국사와 그의 스승 보조지눌 선사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선불교의 국내 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 스님이다. 지눌 스님은 따라서 선불교를 완전히 소화하여 한국적으로 선불교의 문을 연 인물이다. 그의 수제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은 국내파로 불교계에 우뚝 선다. 혜심은 선시(禪詩) 중 차와 관련된 여러 편의 차시(茶詩)를 남겨 선차(禪茶)의 경지가 심원함을 보여준다.

“우뚝 솟은 바위 몇 길인지 알 수 없네/ 그 위 높은 누대 하늘에 닿았네/ 북두로 은하수를 길어다가 밤중에 차를 달이니/ 차 달이는 연기 달 속 계수나무 감싸네.”(‘무의자시집’ 上권)

‘북두로 은하수를 길어 밤중에 차를 달이니’라는 구절은 백미 중의 백미이다. 광활한 우주를 상대로 선(禪)의 깨달음을 다도(茶道)나 차락(茶樂)에 연결시키는 품이 심상치가 않다. 특히 ‘북두로 은하수를 길어’라는 대목은 특히 동이족의 북두칠성 신앙의 전통이나 중국과는 다른 옛 동이족의 기운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혜심에게 시는 선의 한 방편이듯이 차도 한 방편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혜심에 의해 선차는 한 단계 질적으로 승화한 기분이다. 차는 이미 그의 몸의 일부로 동화된 듯하다.

혜심의 저술로는 ‘선문강요(禪門綱要)’ ‘선문염송(禪門拈頌)’ ‘진각국사어록’ ‘무의자(無衣子) 시집’ 등이 있다. 지눌의 저술로 알려진 ‘간화결의론’도 그의 저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 선교일원(禪敎一元)을 주장하였지만 선(禪)보다는 교(敎)를 우선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혜심은 확실히 ‘선’을 ‘교’의 위에 두게 된다.

지눌의 경우는 아직 신라에서 위엄을 떨친 화엄종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며, 특히 중국 화엄종 5조이면서 동시에 하택신회의 법손으로 남종선을 이은 규봉종밀(圭峯宗密·780∼841)과의 의기투합을 느끼게 한다. 규봉종밀은 선(禪)과 교(敎)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던 시절, 양 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화엄종의 입장에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비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의 제자 혜심에 이르면 완전히 돈오돈수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는 지관(止觀)과 정혜(定慧)가 수행의 요체이지만 간화일문(看話一門)에 포함된다고 보는 한편 마음을 고요히 하고 화두를 잡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잡음으로써 고요에 들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철저한 간화선 위주는 지눌보다 더 선사로서의 평가를 받는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혜심은 전남 화순(和順) 사람으로 속성은 최(崔)씨이다. 호는 무의자(無衣子), 자는 영을(永乙)이다. 그의 출생과 행적은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진각국사비(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寺主贈諡眞覺國師碑銘)’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비에 따르면 어머니 배씨가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천둥을 세 번이나 만나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 후 12개월 만에 출산하였는데 ‘태아가 마치 가사 모양의 태의(胎衣)’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혜심은 일찍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아 출가를 원했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유학공부를 하고 사마시에 합격한다. 그 후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재(齋)를 올리고 명복을 빈 뒤 출가하게 된다.

그가 조계산에 도달할 무렵, 지눌 스님은 ‘수선사’(修禪社)라는 결사를 연다. 수선결사는 때마침 일어난 무신정변의 물결을 타고 종래 문벌귀족들과 결탁해 있던 불교집단들에 반격을 시작한다. 결사 취지문은 “함께 정(定)과 혜(慧)를 익히고, 예불하고, 경전공부와 노동 등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인연에 따라 본성을 기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더욱이 수선결사는 백성들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문호를 개방하여 선종, 교종은 물론이고 유교, 도교를 공부한 사람까지 포용하였다.

1205년 의종 1년 가을, 혜심이 지눌을 찾아 불교에 귀의할 뜻을 비치자 지눌은 “나는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가 출세할 무렵은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였다. 그는 이규보를 비롯한 무신정권의 권력자들과 교유하는 처지가 되었다. 출가하기 전에 사마시에도 급제한 처지여서 쉽게 권력자들과 통했으나 그는 권력에는 마음이 없었다. 1208년 지눌 스님이 법석을 혜심에게 전해주려고 하자 그는 이를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돌아온 것은 스승이 돌아가고 불교계와 조정의 권유를 못 이겨 송광사의 2세 주지를 맡고부터이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가면 월남사지(月南寺址·전남기념물 제125호)가 있다. 월출산의 남쪽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 일대에서는 일제 때 ‘백운 옥판차’라는 덩어리차(團茶)가 생산된 곳이다.

진각국사가 활동하던 고려 때 월출산 일대는 다양한 차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발효차였다. 조선에 들어오면서 녹차로 바뀌었다. 지금은 강진이나 해남의 또 다른 차향(茶鄕)에 밀려 이름이 높지 않지만 한때는 차로 이름이 높았다. 월출산 일대는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家人一雄)가 조사할 당시(1937∼1939년)만 해도 거의 떡차류가 생산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도 살아있었다면 2000년 초 중국의 보이차가 물밀듯이 들어올 때 우리 차도 효과적으로 대응했을지도 모른다. 푸얼차(보이차)에 그렇게 쉽게 우리 차계가 엎어져서 국제적으로 푸얼차 값을 터무니없이 올리고, 갑작스러운 한국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화학적으로 빨리 발효시킨 숙병을 중국 당국이 만들어내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각국사의 비석이 남아 있는 월남사는 그가 주석하면서부터 차의 고향이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차 제조법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차와는 다르다. 주로 엽전모양으로 만든 전차(錢茶)를 비롯하여 덖음차 종류의 백운 옥판차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때는 죽로차가 덖음차류였는데 현재는 녹차류로 바뀌었다.

송광사 광원암 뒷산에 모셔진 진각국사의 부도탑에 차를 공양하고 있는 차인들.
혜심은 보조국사를 이어 송광사의 2대 조사가 되었다. 그의 차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조계산 자락에 안긴 광원암(廣遠庵)은 진각국사가 주석하면서 ‘선문염송’을 저술한 역사적 현장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작설차(雀舌茶)를 노래했다. 광원암은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1958년에는 폐허가 된다. 그 뒤 30년간 진각국사의 부도인 원조탑(圓照塔)만이 폐허를 지켜오다가 1992년 송광사 선원에서 정진하던 전 송광사 주지 현봉(玄峰) 스님의 발원으로 중창되어 다시 진각국사의 선풍을 밝히게 되었다. 해마다 원조탑에서 헌다례가 행해진다. 진각국사는 화순에서 태어났지만 사적비가 있는 강진의 월남사보다 원조탑을 모신 조계산 송광사 광원암이 더 연고가 깊다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선문염송’을 집필했고, ‘배선사장실자설다연(陪先師丈室煮雪茶筵)’이란 시의 무대도 송광사이다.

송광사 현봉 스님이 찬한 ‘광원암 적취당 상량문’에는 진각국사의 다선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계산은 삼광(三光)이 온화하고 지세가 정미(精微)하며 시절 따라 상서로운 기색이 변하여 서리어 있는 풍취나대(風吹羅帶)의 형국인 선경(仙境)인지라. 금선(金仙)을 구하는 운수(雲水)들이 다투어 결사(結社)하는 동천(洞天)이며, 그 가운데서도 서록(西麓)에 호중(壺中)의 별유세계가 있으니 가히 출세간의 고사(高士)들이 안거하기에 최적의 복지(福地)로다. 하여, 백제 무령왕(武寧王) 14년(514년·甲午年)에 가규(可規)대사는 여기에다 길상(吉祥)의 가람을 일구었으니, 이 암자는 조계산중에서 가장 먼저 터 닦은 도량이다. 고려 때 불교의 제종파 여러 유파를 회통시켜 해동불교를 정립시키고 간화선(看話禪)을 처음 유포시킨 불일보조(佛日普照) 국사의 제자인 무의자(無衣子) 진각국사 혜심은 이곳에서 불조(佛祖)의 기봉(機鋒)이며 인천(人天)의 안목인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을 지어 그 자량(資糧)을 삼게 하였으니, 이곳에서 조사의 선법이 광원유포(廣遠流布)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광원암이라 하였다 한다.”

설두중현(雪竇重顯)의 후신으로까지 회자되는 진각국사는 다삼매에 든 여러 차시를 남기고 있다. ‘다천(茶泉)이란 시를 보자.

“소나무 뿌리에서/ 이끼를 털어내자/ 샘물이 영천(靈泉)에서 솟구친다./ 상쾌함은/ 쉽게 얻기 어려우니/ 몸소/ 조주(趙州) 선(禪)에 들지어다.”(‘무의자시집’ 下권)

끽다거의 조주 스님을 흠모했던 진각국사는 샘물을 통해 조주의 다선일미의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혜심이 스승 보조국사를 찾아 백운암을 찾았을 때 지은 ‘백운암에 이르러(到白雲庵)’이다.

“아이를 부르는 소리는 안개 낀 송라에 떨어지고/차 달이는 향기는 돌담 위에 부는 바람에 전해오네/백운산길 접어들자마자/암자의 노승은 이미 뵈었네.”

다음은 ‘묘고대 위에서 짓다(妙高臺上作)’이다.

“고개 마루 걸친 구름 한가로이 걷히지 않고/시냇물은 어찌 그리 바삐도 달리는가/소나무 아래에서 솔방울 주워다가/차 달여보니 그 맛 더욱 향기롭네.”

솔방울을 따서 불을 피우고, 차를 달여 마시는 가운데 혜심은 선정(禪定)에 들었다. 자연과 일거수일투족이 하나가 되어 있는 스님의 모습, 그에게 시(詩)와 차(茶)는 선정(禪定)과 이미 일체의 경지이다.

차 연구가 최정간씨(하동 현암도예연구소장)는 “진각혜심의 위대한 점은 중국화된 불교를 고려적인 토양과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데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그의 필생의 노작인 ‘선문염송’은 고려 고종 13년(1220년) 겨울 49세 때 조계산 수선결사에서 문도 진훈(眞訓)과 더불어 선종의 고화(古話) 1125측과 이에 대한 선종의 선사들 중에 신라 선사들도 포함시켜 어화(語話), 즉 미(微), 염(拈), 화(化), 별(別) 30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선문염송에 실린 총 1463측 가운데 신라와 관계되는 자료는 23측에 해당된다.”

1219년 그는 조계산 수선사에 주석하면서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를 겸하였다. 선문염송집은 단속사에서 각성(刻成)되었다. 선문염송집의 발문은 당시 무신정권 실세였던 정안(鄭晏 ?∼1251)에 의해 쓰여졌다. 단속사 주지는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 최이(崔怡)의 아들 만종(萬鍾)이었다.

불교학자 김호동씨는 진각국사와 만종의 관련을 이렇게 말한다.

“지눌은 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일으켰다가 최충헌이 집권한 무신정권 시대에 그 중심을 전라도로 옮겨갔다. 만종이 수선사주 혜심에게 머리를 깎고 들어가 단속사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 사업을 주도해 나가자 경상도 지역의 불교계는 수선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나아가 최씨 정권과 연결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혜심은 최충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불교의 토착화에 진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혜심이 조계산 수선사에 머물 때 최씨 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우(崔瑀)는 차와 향, 가사 등을 하사하였다. 한국인은 이상하게도 사대적(事大的) 문숭상 전통에 의해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세계 최대의 제국 몽골에 수십년간 저항한 사건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자주정신을 선양할 수 있는 예이다.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비문에는 “보조국사가 달이는 차 향기는 천 걸음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눌과 혜심은 선차의 정신과 자주의 정신을 드높인 선사였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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