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꽃샘 추위가 지나간, 따뜻한 봄날의 토요일 오전 11시 덕수궁 대한문 앞은 왕궁수문장 교대식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된다. 덕수궁 돌담길로 옛 궁중의 제복을 입은 수문장과 군인들이 열을 지어 나온다. 취타소리, 북소리, 나팔소리를 내며 뒤를 잇는다. 누군가는 영국 버킹엄의 근위병 교대식보다 매력적이라는 감탄을 내뱉는 장관이다.

덕수궁은 고종이 승하한 뒤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해 궁역이 크게 줄었고, 많은 전각들을 철거해 공원으로 조성함으로써 현재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가족, 친구, 연인과 나들이하기 좋은 공원으로 소개되기에는 발걸음 닿는 곳곳에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는 곳이다.
■ 김구 선생의 목숨을 살린 한통의 전화
함녕전은 고종의 환어와 함께 1897년 건립된 황제의 침전이자 접견실이다. 함녕전 대청마루에는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됐다. ‘대청 전화’라 불린 이 전화기는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처형하고 체포되어 사형대에 오르던 김구 선생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그 일화가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1909년 김구의 사형집행 서류를 검토하던 고종은 사형집행 직전에 굳은 결심을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김구의 사형집행을 정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숨을 거둔 것이 1949년이니, 전화기 한 대가 한 사람의 40년 인생과 해방의 꿈을 모두 살린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함녕전에서 김구 선생의 목숨을 살렸던 고종은 일제의 독살로 1919년 1월 21일 이곳 함녕전에서 숨을 거둔다.
■ 정관헌 가득한 가비 향
교역을 통해, 또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들에 의해 이미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황제로 기록돼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며 커피(가비) 애호가로 변모한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어한 후에도 커피를 즐겨 드셨다고 한다.
조선인 최초의 커피 매니아, 고종은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즐겼을까. 당시 우리나라에 소개된 커피는 각설탕 속에 커피가루를 넣은 것이었다. 뜨거운 물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종이 직접 커피를 타서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때에는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형 미스 손탁이 고종의 바리스타였다.

손탁이 상냥한 얼굴로 내어주던 커피에 감동을 받은 고종은 이후 손탁에게 정동의 건물 한 채를 하사한다. 몇 년 후 손탁은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을 짓고 1층에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인 ‘정동구락부’를 연다.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바로 손탁 호텔이 있던 자리다.
고종은 덕수궁 내에 정관헌을 만들어 커피를 즐기고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열었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정관헌은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조요히 궁궐을 내려다 본다’는 뜻을 가진 정관헌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쓰고도 달콤한 한 잔의 커피에서 고종이 자신의 모습을 씁쓸히 즐기지 않았을까 회상했다고 한다.
최근 고종황제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우리 영화 <가비>가 개봉했다고 하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덕수궁 정관헌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었으면 한다. 정관헌은 매주 토요일 9시부터 18시까지 내부 개방을 한다. 11시와 오후 2시, 4시에는 해설사의 안내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이한호(쥬스컴퍼니 대표, ceo@comefunn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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