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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0> 롤랑 바르트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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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3-25 21:05:37 수정 : 2012-03-25 21: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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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1915∼1980. 3. 26) 타계 32년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비평가인 그를 기리며…
3월 26일은 구조주의 기호학자이자 사상가이고, 비평가이면서 뛰어난 에세이스트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년 11월12일∼1980년 3월26일)가 세상을 뜬 지 서른두 해가 되는 날이다. 바르트는 1980년 2월 25일에 오랜 친구인 자크 랑의 권유로 당시 프랑스 사회당 당수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주재하는 회식에 참석한 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오후 4 시경, 소르본 대학 후문의 에콜 가에서 길을 건너던 바르트는 달려오는 작은 트럭을 피하지 못한 채 사고를 당했다. 그는 즉시 살페트리에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같은 병원에서 사망한다.

나는 발터 벤야민만큼이나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책들이 보여주는 혼돈을 뚫고 나가는 시각의 독창성, 문체의 우아하고 발랄함, 사유의 깊이들을 좋아한다. 좋아하니, 당연히 그의 책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다. ‘중립’(동문선, 2004)도 그렇게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1978년 2월 18일부터 6월 3일까지 13주 동안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하기 위해 준비한 단상과 메모들을 엮은 것이다. 여기에는 참고 문헌정보들, 요약, 주(註)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강의의 주제는 ‘중립’, 더 정확하게는 ‘중립의 욕망’이다. 중립은 영도(零度)다. 갈등을 빚고, 선택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사안이 생기고, 그런 정황에 처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들, 즉 갈등·선택·책임에서 달아나 그것들을 제거·회피·중지라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좌절시키고 주체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피하는 것, 즉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서 그것 안에 자신을 숨기는 게 중립이다. 중립은 새로운 존재 양식을 찾는 하나의 자유로운 선택이고 방식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강의의 목표를 밝히면서 이렇게 쓴다. “나는 중립을 패러다임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규정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패러다임을 좌절시키는 모든 것을 중립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의 사실을 명명한다. 나는 하나의 이름 아래, 즉 여기서 중립이란 이름 아래 여러 가지 것들을 결집시킨다.” 첫 강의 주제로 다루어진 것은 ‘호의’와 ‘피로’다. 이 사소한 것들이 강의의 첫 주제라니! ‘피로’는 2월 18일의 첫 강의와 이어진 2월 25일의 강의에서도 이어지는 주제다.

바르트는 피로에 대해 “사회적 휴식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개인적 육체의 소모적 요구”이고 “어떤 강렬함”이라는 것, 그리고 사회는 피로를 병가(病暇)와 같은 것을 줄 수 있는 구실, 즉 질병적 현실로 잘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다. 바르트가 피로를 ‘계급적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언급할 때 나는 약간 놀란다. 피로는 세 개의 측면을 갖는다. 첫째, 노동으로서의 피로, 둘째, 게임으로서의 피로, 셋째, 창조로서의 피로. 먼저 피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노동에 따른 육체의 소모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로는 일의 시작과 함께 일이 요구하는 어떤 무한함이다. 피로는 육체나 근육의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것이며, ‘정신적 체감’이다.

바르트가 포착하고 의미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피로는 어떤 의미에서 죽음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결정적인 것인 반면에 피로는 육체 속에 살 수 있는 무한성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피로는 “사회적 변명 능력의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 피로는 발언·성명·서명 따위의 요구로 가득 차 있는 세계에서 일종의 입장 표명이라는 것이다. 원치 않는 입장 표명들의 요구에 대해 우리는 피로 뒤로 숨어버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님, 즉 중립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피로라는 구실을 내세워, 단지 ‘나를 가만히 있게 해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피로 뒤로 무의식적으로 피신”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피로는 “회피·보호의 사회적 게임” 속으로 포섭된다.

셋째로 피로의 자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중립이다. 그것은 철학도, 체계도 아니다. 피로는 평범한 대화들에서 만들어지고, 지칠 줄 모르고 말하는 타자에게서 온다. 많은 피로들은 강요당하는 무엇무엇에 관한 입장의 피로들이다. 피로는 고갈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후퇴이고, 여러 입장에 대한 중립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피로를 유보 없이 받아들일 때 피로는 창조적인 것으로 바뀐다.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그러니까 피로의 권리는 새로움에 속한다. 새로운 것들은 피로, 신물남으로부터 태어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낮잠. 원치 않는 입장 표명들의 요구에 대해 우리는 피로 뒤로 숨어버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피로라는 구실을 내세워 ‘나를 가만히 있게 해줘’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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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1915년에 프랑스 북부 셰르부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군 장교이고, 어머니는 알자스의 유리 제조인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혈통을 설명하면서 “4분 1은 옛 귀족, 4분의 1은 지주 부르주아, 4분의 2는 자유직 부르주아가 전반적인 가난 속에 한데 어우러진” 가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팔방미인’이라고 부를 만큼 다재다능한 사람으로서 문학, 기호학, 신화학, 서사학, 분류학, 글쓰기, 패션, 사진, 독서론, 텍스트의 유형학 등 여러 분야의 책들을 썼다.

청년 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작파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다. 젊은 시절에는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한다. 1953년에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를 내고, 1957년에 ‘현대의 신화’(동문선, 1998)를 잇달아 내놓는다. 바르트는 두 권의 책을 내놓으며 프랑스 지식사회에 제 이름을 알렸다. 1970년에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1997)을 내놓으며 문학비평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다. 혁명적 선언이다. 그 이전까지는 독서를 한다는 것, 혹은 문학비평을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 안에 드러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저자의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는 여러 목소리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한 인격체로서의 ‘저자’는 자기 텍스트의 극 속에 초대된 사람일 뿐이고, 다른 인물들 속의 한 인물이다. 그의 문학작품은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빌려와 조립한 것이다.

“그의 텍스트로부터 와서 우리 생 속에 들어가는 저자는 통일된 단위가 없다. 그는 간단히 복수적인 ‘매력들’이며, 몇몇 가냘픈 세부사항의 장소이고, 그럼에도 싱싱한 소설적 광휘의 근원이며, 다정함들의 불연속적인 노래이다.”(‘사드, 푸리에, 로욜라’ ) 저자는 의미의 생산자이고 독자는 소비자라는 오래되고 견고한 등식은 지워진다. 독자 역시 저자와 동등하게 텍스트의 의미 생산에 참여한다. “대답, 그것은 거기에 자기의 역사, 자기의 언어, 자기의 자유를 가지고 와서 대답을 하는 우리들 각자이다. 하지만 역사, 언어, 자유는 끝없이 변하기에, 세상이 작가에게 하는 대답은 무한하다. 사람들은 모든 대답 밖에서 씌어졌던 것에 한시도 쉬지 않고 대답한다.”(‘라신에 대하여’)

롤랑 바르트와의 인상적인 만남은 ‘기호의 제국’(민음사, 1997)에서 이루어졌다. 바르트는 일본을 방문한 뒤 음식, 정원, 집, 꽃꽂이, 얼굴, 하이쿠, 파친코 따위로 구성된 일본이라는 텍스트 안에서 문화적 포장들이 내용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것은 실재들이 기호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물의 표면이 사물 그 자체인 문화, 표면이 심층을 대신하는 문화를 놀라움 속에서 목격한 것이다. 기표들은 어떤 기의도 머금지 않는다. 포장 자체가 내용을 이룬다. 기표가 기의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사물의 안쪽은 공(空)이고, 그걸 감싼 포장이 실체다. 포장과 포장된 것, 안과 밖, 가면과 가면 뒤의 맨얼굴, 실체와 본질들 사이로 공(空)이 있다. 포장을 내용물을 삼켜버리고, 가면은 맨얼굴을 먹어버린다. 표면이 곧 심층이다. 언제나 형식이 내용을, 실체가 본질을, 겉이 안을 삼켜버린다. 일본 문화는 깊이를 지양한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책 중에서 ‘일본’을 기호의 진열장으로 보고 일본적인 것을 기호학적으로 해석한 이 책을 가장 사랑한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에 걸쳐 읽으며 바르트의 ‘흔적들’을 찾아낸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만드는 것은, 그의 치환 불가능성, 즉 저자에 의해 남겨진 흔적이다.”(뱅상 주브, ‘롤랑 바르트’, 민음사, 1994)

그는 독서가를 두 부류로 나눈다. 책에 밑줄을 긋는 사람과 긋지 않는 사람. 그는 후자였다. 바르트가 자기가 읽는 책에 흔적을 남기기 싫어했듯이 나 역시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르트의 글들은 “쾌활하고, 빠르고, 조밀하고, 날카롭다.”(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그래서일까? 바르트의 책읽기에는 달콤한 쾌락이 있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바르트의 책들은 다음과 같다. ‘사랑의 단상’(문학과지성사, 1991), ‘카메라 루시다―사진에 관한 노트’ (열화당, 1986),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1997), ‘신화론’(현대미학사, 1995), ‘작은 사건들’(동문선, 2003),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강, 1997),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강, 1998), ‘이미지와 글쓰기’(세계사, 1993). 더러 빠진 게 있을지 모르겠다.

장석주 시인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롤랑 바르트 ‘중립’ 동문선, 2004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강, 1997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시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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