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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① 크레타 올리브와 포도잎 쌈밥 돌마데스

관련이슈 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

입력 : 2012-02-05 23:35:17 수정 : 2012-02-05 23: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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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그늘에 앉아 ‘신들의 만찬’을 즐기다
20년 동안 천직처럼 낯선 세계를 주유한 노마드 소설가 함정임씨. 한 곳에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일상에서조차 철저히 노마드적 인생을 살아가는 생동감 넘치는 그녀를 통해 익숙하지만 새롭게 발견되는 음식이나 여행지를 찾아간다. 쳇바퀴 속 일상이 아닌, 이방인의 눈으로 삶의 이면을 꿰뚫고 세상의 새로운 가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창조적인 즐거움을 격주로 제공할 예정이다.

#올리브 나무 평원을 달려 에게 바다 한가운데로

크레타로 향하는 크노소스 팰리스 호는 밤 10시에 떠났다. 선상에 올라 바다로부터 멀어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밤의 피레우스 항구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직도 귓전에는 온종일 그리스 산야를 달리며 들었던 부주키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마법의 악기처럼 그 소리는 중독성이 있었다. 마치 현대에서 고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이 선율은 발칸 반도의 남쪽 땅 끝인 수니온 곶에서 그리스 북동부 테살리아 대평원 끝의 메테오라까지 나를 이끌었다. 특히 석양 무렵 크레타를 향해 먼길을 달릴 때 이 선율 따라 부르는 마리아 파란투리의 목소리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공명을 일으켰다.

‘카타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기차를 타고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애인을 배웅하러 역에 나온 여인의 심정, 그 슬픔을 누가 알까. 또한 신화의 나라 그리스가 21세기 유럽 경제 위기의 진앙으로 떠오를 줄 누가 알았을까. 파란투리의 낮게 퍼지는 저음의 목소리는 연인의 이별을 비통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처뿐인 영광으로 불안과 빈곤의 상징으로 떠오른 오늘의 그리스 현실을 절규하듯 처절하게 들렸다.

발칸 반도를 덮치고 있는 불안정한 기류와 근심일랑 배에 오르면서 모두 내려놓았다. 이 순간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오직 에게해의 물결과 바람만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갈수록, 정작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던 올리브밭의 나무들과 그 열매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혀 속에 침이 고였다. 월계수 마른 잎과 말린 토마토를 잘게 다져 와인 식초에 절인 올리브 한 알의 맛에 대한 기억이 혀의 침샘을 자극한 것이었다. 지지고, 볶고, 무치는 한식의 고유성이 참기름과 들기름을 잘 골라 쓰는 데 있듯, 뿌리고, 섞고, 굽는 유럽 음식 고유의 맛은 이 작고 푸르고 단단한 지중해의 열매로부터 나왔다.

그리스 산야를 뒤덮은 올리브 나무.
그동안 나는 남프랑스에서, 스페인에서, 또 이탈리아에서 수없이 올리브나무들과 마주쳤고, 다양한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막을 거쳐 이곳으로 날아오기 전까지 내 부엌의 찬장에는 크레타산 올리브와 그 오일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아침이면 청사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달맞이 언덕의 식탁에서 여린 잎들과 건자두와 페타 치즈 한두 조각에 이 열매를 얹고 이 오일을 뿌려 먹곤 했다. 와인 식초에 절인 그 자그마한 올리브 열매를 입에 넣고 지그시 눌러 씹을 때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메사라 평원과 석회암질의 토양, 그 위를 흐르는 대기와 태양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언젠간 그곳으로 가리라 꿈을 꾸었었다. 한 알의 올리브 열매에서 촉발된 떠남이기에 그리스에 발을 딛는 순간, 내 시야는 온통 올리브 나무들이 점령했다. 동해바다에서 에게 바다로 떠나면서 나는 조르바가 외쳤던 고함을 내 결심인 양 되뇌였다. “항상 무엇인가를 찬미하라. 찬미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그리스에서 나는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한의 것을 누릴 것이며, 언제나 내 손으로 만드는 음식처럼 나에게 건네주는 음식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맛의 진실을 찾을 것이었다.

크레타문명의 비밀을 간직한 크노소스미궁의 올리브 항아리.
#유럽의 발원지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의 올리브 항아리

새벽 5시30분 크노소스 팰리스호는 크레타 이라클리온 항구에 닿았다. 아직 일출 전이었고, 바다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이 새벽의 천지에 가득했다. 부근 키오스 섬의 눈먼 가인 호메로스는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포도 꽃 피는 풍요로운 섬, 바다에 떠 있는 부유한 나라’로 크레타를 노래했다. 사방에 번지기 시작한 여명 빛처럼 은근한 흥분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배에서 내려 새로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왼편으로 푸른 바다와 하늘 사이에 베이지색의 베네치안 성벽의 긴 담이 보였다. 성벽의 이름은 이 풍요로운 섬이 중세기에는 이탈리아의 속령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저 성벽 어디쯤에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여명의 크레타 이클라리온 항구.
항구 앞 베니젤로 광장에 위치한 숙소에 짐을 풀고 아침 식사로 간단하게 산양 젖을 발효시킨 페타 치즈와 토마토, 올리브, 야채로 구성된 그리스 샐러드와 신선한 요구르트에 야생꽃에서 채취한 꿀과 호두를 얹어 먹고 크노소스 궁으로 향했다. 크레타는 제우스의 고향이자, 그가 황소로 변신해 사랑하는 여인 에우로파를 등에 태우고 도망쳐온 곳. 유럽이라는 말은 바로 이 여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 크노소스는 제우스의 아들인 크레타의 통치자 미노스 왕이 천재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에게 의뢰해 건축한 궁이었다. 옆에 떨어져 있는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로 미궁은 전설 속으로 파묻혔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세상에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해 20세기 초에 대대적으로 발굴이 진행되었다. 에게해의 폼페이라 불리는 이 폐허의 궁전에서 내가 제일 먼저 찾아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크레타 문명의 비밀을 간직한 높이 70㎝의 올리브항아리들이었다. 이 항아리에 새겨진 크레타 문명의 상징인 두 줄기의 소용돌이 무늬를 확인하는 것보다도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크레타 산지사방에 자라는 올리브 나무,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그 나무의 작고 단단한 열매들을 저장하는 가장 오래된, 곧 태초의 현장이었다.

크노소스 궁전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잘생긴 올리브 나무 한그루였다. 그 옆 조금 떨어져 뽕나무 한 그루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무성한 잎을 활짝 펼치고 서 있었다. 아테네 시내의 가로수가 뽕나무일 정도로 그리스에는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 다음으로 이 나무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이국의 여행자들이 줄지어 햇빛 쏟아지는 폐허의 미로 속으로 걸어가고, 나는 보호수로 지정된 한 그루 올리브 나무 앞에 좀더 머물렀다. 나무는 미궁이 발견되기까지 이곳이 올리브밭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목이었다. ‘백합 왕자의 프레스코’ 벽화를 지나 사람들이 사라진 동쪽 주랑을 따라 부지런히 걷자 동쪽 요새 근처에 거대한 항아리들이 하얗게 부서지는 태양빛 아래 숨을 쉬고 서 있었다. 나는 오래 찾아오던 보물과 맞닥뜨린 듯 감격에 휩싸였다. 비로소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리운 어떤 것의 실체를 만난 듯했다. 내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 듯 사방이 고요했고 하늘 아래 이 세상에는 항아리와 나, 둘 뿐인 것 같았다.

그리스 전통 음식 포도잎과 양배추 쌈밥 돌마데스.
#올리브 나무 아래 포도잎 쌈밥 돌마데스

정오를 넘긴 시각,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잠들어 있는 베네치안 성벽의 요새에서 내려와 마리아 파란투리의 노래를 들으며 해안가 타베르나(식당)로 갔다. 그곳 해안가에 가면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결 따라 부주키 선율에 맞춰 힘차게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조르바를 만날 수 있을까. 크노소스 궁의 미로에서 카잔차키스 무덤까지 돌아보는 동안 태양은 정수리 위에서 번쩍였다. 목이 말랐고, 현기증을 일으키며 급격하게 허기가 몰려왔다. 크레타에서 내가 선택한 점심은 포도잎 쌈밥 돌마데스와 장작불에 구워낸 양 갈비 요리. 사흘간의 그리스 여행에서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그 고장 특유의 올리브와 돌마데스라는 전채 요리였다. 다진 고기와 야채, 밥을 포도잎으로 싸서 찐 돌마데스는 지방마다 다른 듯, 델피 같은 중부 내륙에서는 포도잎이 아닌 뽕잎과 양배추 쌈 돌마데스였고, 더 북쪽 기암괴석 위에 지어진 수도원 지대인 메테오라에서는 피망과 토마토 안에 볶은 밥과 허브로 채워서 오븐에 구워내는 게미스타였다.

크레타 고유의 돌마데스를 기대하며 타베르나에 들어섰다. 넓은 정원에 올리브 나무들이 눈에 띄었고, 나무를 중심으로 식탁들이 모여 있었다. 석조로 지어진 본채로 들어갔다. 둥그런 화덕이 실내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양고기가 타오르는 장작불에 검누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장작불의 열기 탓인지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40도에 육박하는 강한 태양빛 속을 떠돌아 다녀서인지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이라클리온산 화이트 와인 한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근처 해변에선가 부주키 선율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태양빛이 너무 강해서 모든 것은 보는 순간 본성만 남기고 하얗게 변해버리는 듯했다.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올리브 나무 옆 그늘에 앉아 시원한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찝찔한 올리브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 크노소스 궁에서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던 올리브 항아리가 연인의 얼굴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곧 돌마데스가 나왔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세상을 멋지게 사는 방법으로 귀띔해준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 “찬미하라.” 포도잎 쌈밥 돌마데스를 반으로 썰어 얼른 한 조각 입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안에 도는 포도잎과 올리브 오일의 향기와 밥의 맛을 음미했다. 방금 떠나온 카잔차키스 무덤 묘비에 새겨진 명문장이 감탄사로 터져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글·사진 함정임(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가 함정임은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스물여섯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 2012년 현재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소설 창작과 이론 강의 병행.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동행’ ‘당신의 물고기’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곡두’, 장편소설 ‘행복’ ‘춘하추동’ ‘내 남자의 책’,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 예술기행서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인생의 사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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