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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걷기여행] ‘주혼’전통 사라진 여인국

입력 : 2012-01-31 15:25:37 수정 : 2012-01-31 15: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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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걸어볼 만한 참 아름다운 길. 하지만 두 번은 힘들어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사양할 것이다. 마른 억새가 무성한 언덕을 오르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른 풀이 가시처럼 바지를 뚫고 들어왔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사정없이 찔러댄다. 아줌마와 나는 그놈의 가시를 떼어내느라 자주 멈춰 섰다. 그때마다 한숨 속에 감탄이 뒤섞인다. 등을 돌려 바라본 진사강이 굉장하다. 넓은 대지와 거대한 산자락을 둥글게 휘감아 흐르는데, 몇 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우와’하고 탄성이 터진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에 숨이 차고, 대자연이 펼쳐 보이는 장관에 숨 막히고. 이 길은, 정말 이래저래 숨 쉬기가 곤란하다.

오늘 묵기로 한 민가의 모쒀인 할아버지는 아줌마와 내가 걱정됐나 보다. 친히 마중을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키 180센티미터쯤의 건장한 체격,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 긴 코트의 한쪽 팔은 입고 한쪽 팔은 빼서 허리춤에 끼워 넣은 게, 영락없는 티베트인 행색이다. 실제로 총 인구 8만여의 모쒀인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다. 중국어가 주어+서술어+목적어 어순인 반면, 이들이 사용하는 모쒀어는 티베트어와 어순이 일치한다. 모쒀어는 티베트어처럼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모쒀어도 점점 중국어 어순을 닮아가고 있단다. 언어도 환경과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진 못하나 보다.

산언덕에 자리한 할아버지 집은 별장처럼 근사하다. 전형적인 모쒀인의 전통가옥으로, 외관 전체를 통나무로 꾸몄다. 통나무를 우물정자 모양으로 층층이 얹은 후, 그 틈새를 흙으로 메워 지은 귀틀집이다.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 한쪽에 잘 익은 호박이 산처럼 쌓여 있다. 호박을 쪼아 먹던 닭들이 아줌마와 내 인기척에 놀랐는지, 푸드득 활개를 쳐댄다. 닭들의 소란에 부엌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걸어 나오셨다. 환하게 웃으며 우릴 반긴다. 할머니 인상이 얼마나 인자하고 푸근한지 몇 년 만에 외할머니댁에 놀러온 기분이다.

아줌마와 나는 가방을 철퍼덕 내려놓고 부엌 옆 미니의자에 앉았다. 할머니께서 내온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니까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비타민도 보충할까, 귤을 까서 반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아우 셔, 귤이 아니라 레몬이네, 레몬이야.” 오만상이 찌푸려지면서 눈물까지 난다.

“여긴 깊은 산골이라 햇볕이 적어요. 그래서 귤이 달지 않고 아주 시죠.”
나만 몰랐던 거야? 아줌마는 귤에는 손도 대지 않고, 차를 홀짝이며 호호호 웃는다. 옆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던 할아버지는 내가 궁금한가 보다.
“아가씨는 어디서 왔소?”
“한국에서요.”
“아, 남조선에서 왔구먼. 그래, 젊은 아가씨가 겁도 없이 혼자 왔소? 낭군은 없는가?”
모쒀인에게 이런 가부장적인 질문을 받을 줄이야. 지금도 모계사회 전통이 남아 있다고 들었는데.

할머니가, 어머니가, 큰딸이 ‘가장으로서 집안 대소사를 결정할 권한을 가졌다’고 하기에, 최소한 양성평등(兩性平等)할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나름 ‘모쒀인의 여인국’을 흠모해왔는데. 아님, 할아버지는 내 얼굴이 동안이고 너무 예뻐서 여행하다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하시는 건가.

“혼자라뇨, 아줌마랑 함께인데요.”
씩씩한 척 말했다. 이참에 나도 모쒀인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여쭤야겠다. 아줌마는 그런 질문은 모쒀인에게 실례라고, 루구호에서 혼자 여행할 때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진사강 건너는 배에서 내게 신신당부했지만. 어디, 모쒀인 가정에서 잘 기회가 흔한가.

“있잖아요, 할아버지, 모쒀인은 결혼제도 자체가 없다던데, 연애만 하고 산다던데, 정말이에요?”
“다 옛말이야. 나도 우리 할멈이랑 40년 가까이 함께 살고 있다오. 우리 두 아들도 정식 결혼해서 살고 있어. 큰아들이 의사야, 며느리는 학교선생이고. 작은아들 내외도 다 대학 나왔잖아. 걔네도 번듯하게 직장생활 하면서 아이들 낳아 키우고. 요즘 세상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이들 학교 다니는데 불이익이 따르지. 그러니 더이상 모쒀인 전통대로 살아가긴 힘들어.”

모계사회의 전통이 희미해진 여인국. 주혼의 전통이 사라진 여인국. 여행자 입장에서는 그저 안타깝다. 그들 ‘스스로 원한 변화’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방이 여러 개다. 할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사용하란다. 그런데 이 방이 저 방 같고, 저 방도 이 방 같다. 방마다 달랑 침대 4개. 이불과 베개 외에 아무것도 없다. 물론 전기도 없다. 이불과 베개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동한다. 바닥에는 이전 손님이 발로 비벼 끈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창턱에 사용한 양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무래도 쾌적한 밤은 물 건너갔지 싶다. 하긴, 지금 내 몸에서는 뭐, 좋은 냄새가 나나? 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산에서 노숙하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다.

저녁 지으러 부엌에 내려왔다. 류칭에서 머문 나시족 민가와 아주 흡사한 구조다. 천장에 옥수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한켠에서 두툼한 삼겹살이 꾸덕꾸덕 건조되어 간다. 찬장에서 아줌마가 꺼내온 예쁜 공기와 접시를 보니, 이 집 가계가 대충 짐작 간다. 제법 풍족한 살림이 틀림없다. 모쒀인에게도 부엌의 화로는 거실이며, 집안의 중심이다. 가장 아랫목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정사진이 마오쩌둥 사진과 나란히 걸려 있다. 나는 사진을 구경하고 무심결에 앉았다가 아줌마한테 한소리 들었다.

“거긴 집안의 제일 어른이 앉는 자리예요. 할아버지 오시기 전에 얼른 일어나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값을 해야지. 나는 아랫목에서 발딱 일어나 부엌문이 가까운 윗목으로 가 앉았다. 할머니가 화로에 수유차를 끓이는 동안 아줌마가 저녁을 준비한다. 나를 위해 특별요리를 하는 셈이다. 산골 모쒀인의 평소 식사는 티베트인들과 다르지 않다. 미숫가루 맛이 나는 짬바와 수유차면 오케이. 할머니가 따라준 수유차 역시, 라싸에서 마셨던 맛 그대로다. 설탕을 한 숟가락 듬뿍 넣어주셔서 코코아처럼 달달하면서도 아주 고소하다.

아줌마는 다양한 요리를 순식간에 척척 만들어낸다. 내가 오전에 “중국인도 호박잎을 먹나요?” 하고 물었던 걸 기억하고, ‘호박잎 나물’을 준비했다. 감자볶음이 먹고 싶다는 내 말에 “메이 원티(문제없어요).”하더니 즉석에서 뚝딱. 배추볶음도 후다닥, 돼지고기 볶음도 쓱싹. 여행 시작한 이래 최고의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할머니가 먼저 밥을 푸고, 음식을 조금 덜어 영정사진 앞에 올린다. 향을 피우고 할머니의 짧은 의식이 끝나자, 아줌마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진지를 퍼드린다. 그 다음은 내 밥, 마지막으로 아줌마 것을 푼다. 밥이 술처럼 술술 넘어간다. 매콤하면서 새콤한 호박잎 나물이 내 입에 딱이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줌마에게 물으니까, 슬며시 조미료 병을 들어 보인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 중국식 냉채요리가 뚝딱이에요.”
역시, 어느 나라에나 ‘고향의 맛’은 하나씩 있다니까. 저녁상을 물리고 마당에 나오니 칠흑처럼 캄캄하다. 마당에 서서 이를 닦는데 난데없이 노란 불빛 몇 개가 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흠칫 놀라 얼른 부엌으로 피신. 알고 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후레시를 들고 마실 온 거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신다. 그리고는 마당 구석에 놓인 커다란 기계에 시동을 건다. 덜덜덜 굉음을 내며 기계가 돌아간다. 갑자기 침침하던 부엌이 환해진다. 할아버지는 이 산골에서 유일하게 자가 발전기를 소유했다. 이곳에는 텔레비전이 있는 집도 흔치 않단다. 그래서 저녁이면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 댁에 모여 연속극을 시청한단다.

“함께 보겠소?”
방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나까지 들어가면 비좁아서 불편할거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어르신들, 재미있게 보고 가세요.”

나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창 밖으로 까만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구름이 잔뜩 껴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하늘은 그대로 운치 있다. 눈을 감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세어본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볼륨을 얼마나 크게 틀어놨는지, 1층 텔레비전 소리가 2층 방에서도 또렷하게 들린다. “죽여라, 죽여라!” 전쟁 드라마로, 쉴 새 없이 폭탄이 터지고 절규하는 여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애절한 목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드라마가 끝나고 마을 어르신들이 돌아가자, 이번에는 할아버지 코고는 소리에 집이 떠나갈까, 귀청이 떨어질까, 과연 이 소음에도 할머니는 잠이 들었을까, 오만 가지 잡생각을 하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아줌마, 일어났어요? 도대체 화장실이 어느 구석에 붙어있는 거예요?”
급하니까 막말이 나온다.
“그냥 대문 열고 나가서 봐요.”

이번엔 그럴 수 없다.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을, 다 큰 처자가 어디 함부로. 나는 문화인이다. 사실은 누가 볼까 창피해서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다시 화장실을 찾아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때마침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 화장실, 아니 변소. 도대체 변소는 어디에 있어요?”
할아버지가 따라오란 손짓을 한다. 그러고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이렇게 문만 열면 온 세상이 화장실인데, 뭘 고민해. 마음에 드는 아무데나 싸.”

퍼뜩 중국의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입향수속(入鄕隨俗). ‘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의 풍속을 따르라’ 는, 즉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란 뜻이다. 나도 이 마을에 왔으니까 이곳 풍속을 따라야겠지? 그런 거지?

여행작가 고승희(blog.naver.com/koara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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