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가장 왕성했던 때 건너가 20년 넘게 머물며 차문화 접해
전남 화순 청년 차밭 500평 가꾸어 쌍봉차 생산… ‘다선의 생명’ 되살려
선차를 말할 때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화두는 우리말로 끽다거(喫茶去), 중국말로 ‘츠차취’다. 츠차취의 주인공은 물론 중국 하북성 석가장 백림(栢林)선사의 조주선사(趙州禪師·778∼897)다. 조주의 스승은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선사이다. 남전보원 선사는 저 유명한, 중국 선종을 중흥시킨, 중국 선종을 가장 중국답게 만들고 토착화시킨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걸출한 제자 3인방 중의 한 명이다. 서당지장, 백장회해와 더불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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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를 찾는 불교신자들과 차인들의 발길이 오늘도 끊이지 않고 있다. |
그런데 철감도윤에게서 차와 관련한 알려진 고사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아마도 중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은 일상사이고, 그러한 문화 속에서 차를 화두의 중앙에 놓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차를 기호품으로 취급하고 상용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그 화두가 필요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철감이 중국에서 공부할 때는 차를 마시지 않았을 리가 없다. 중국에서 차는 물이기 때문이다. 또 차가 가장 왕성할 때인 당나라 시절에 유학하였기 때문이다. 조주가 또한 법형제가 아닌가.
아마도 한국에서 츠차취 대신에 “시원한 물이나 한 사발 먹고 가라(喫水去)”라고 하는 편이 옳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사에서 선종(禪宗)의 기여는 일상에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파한 것일 것이다.
철감도윤의 탄생설화와 무용담은 한국 선종의 기개를 한눈에 보게 한다. 어머니가 신이한 빛이 방안에 가득한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아무래도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래서 825년 당나라로 유학길에 오른다. 철감은 중국 지주(池州)의 남전산(南泉山)에 주석하고 있던 보원(普願)을 찾아가니 보원은 첫눈에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린다.
지금까지 차와 선을 말할 때 남전은 드물게 거론되었다. 백장 선사의 ‘백장청규’가 차선일미를 강조해서 ‘마조(馬祖) 선차’의 골수를 이은 것으로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마조는 강서에서 중국식 선종을 열기에 앞서 천주산 마조암에 주석하면서 차선삼매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천주산은 중국 선종의 3조 승찬(僧燦) 선사가 주석했던 곳이다. 이곳에 마조가 주석하고 있을 때 남전이 찾아와 마조 선차의 골수를 이어받아 천주산에서 멀지 않은 남전촌으로 들어가 차와 선을 병행하였다.
이때 조주선사가 남전을 찾아왔다. 물론 철감도윤도 남전을 찾아 조주와 철감은 법형제가 되었던 것이다. 남전의 선차 없이 조주의 끽다거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조의 차선일여 정신은 백장에 이르러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부식(一日不食)’으로, 남전에 이르러 ‘이류중행(異類中行)’사상으로 드러났다. 중국 문화혁명의 회오리바람에서 선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전의 ‘이류중행’ 사상과 그것을 보다 대중화한 조주의 ‘끽다거’공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감도윤은 스승인 남전보원 선사가 열반(834년)한 뒤에도 중국에서 13년을 더 머물렀으나 당나라 무종 때에 회창파불(846년)이 일어나자 크게 실망하고 신라로 돌아가 선풍을 다시 일으킬 것을 생각한다. 다음해인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게 된다. 그는 귀국 후 금강산 장담사로 가서 머물렀으나 855년(문성왕 17년) 무렵 지금의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산 자락 쌍봉사(雙峯寺)로 와서 10여 년간 종풍을 떨치며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남전은 일찍이 철감을 보고 “우리 종의 법인(法印)이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吾宗法印 歸東國矣)”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동류지설’(東流之說)이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동국이란 신라를 말하는데, 돌아갈 귀(歸)자는 대체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고 보면, 다분히 마조의 스승인 무상선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무상의 법이 신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화순 중리에서 바라보는 쌍봉사는 대번에 사자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이곳은 고려 무신정권의 3대 집정인 최항(崔沆· ?∼1257)이 진도에서 거점을 마련하기 전에 승려의 신분으로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하자 삼별초는 반 개경정부, 반 몽고노선을 표방하고 나선다. 이때 최우의 아들인 최항은 승려로 출가해서 불교의 힘으로 저항하였다고 하는데, 그 절이 화순의 쌍봉사와 진도의 용장사라고 한다.
쌍봉산 쌍봉사의 산문에 이르면 맨 먼저 대웅전이 반긴다. 국내 유일의 3층 목탑식 대웅전이다. 숙종 16년(1690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84년 4월3일 실화로 소실되었다가 1986년 12월30일 복원되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 삼존상은 보통 석존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조성하는데, 여기서는 마하가섭과 아난상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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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의 철감도윤의 부도탑(국보 57호). |
그렇다면 계당산(桂堂山·화순군 이양면 중리)의 쌍봉모습을 가탁하여 이름을 짓고, 그 쌍봉사를 거점으로 활동한 철감이 자신의 호를 쌍봉으로 삼았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쌍봉사 창건설화에는 철감선사의 이야기도 전한다. 쌍봉사 절터에는 만금의 부자가 살고 있었다. 철감선사가 이곳을 관망해 보니 뒷산은 사자가 누워 있는 형상이요 집터는 범선의 형상이었다.
철감선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리고 집터를 잡아주고 그곳에 불도량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삼층 목조탑을 세워 범선에 돛을 단 형상을 하게 만들고, 뒷산에 우물을 파 선객들의 수도처로 정하니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쌍봉사는 그 이전에 이름이 미미하였던 절이었는데 철감의 주석과 함께 구산선문의 하나로 격상되었다. 쌍봉사 호성전(護聖殿)에는 철감과 조주가 법형제임을 과시하는 두 영정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철감은 귀국할 때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였다. 범일은 선종 9산문 가운데 사굴산문의 개조(開祖)가 된 인물이다. 신라 말에는 유학승들이 함께 유학하고 함께 공부하면서 곳곳에서 선종의 위세를 떨치면서 나말려초(羅末麗初)의 혼란 속에서 한 가닥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쌍봉사에는 철감도윤의 부도와 탑비가 모셔져 있다. 산 중턱 언덕 위로 올라가는 계단 주변에는 크게 자란 차나무들이 무성하다. 예쁜 흰 꽃을 피우고 있는 차 꽃을 바라보노라면 문득 철감선사의 영혼의 향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오름길 오른편에는 대나무숲이 무성하고 이곳에 자란 차는 죽로차(竹露茶)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현재 쌍봉사에서는 연차(蓮茶)가 유명하다. 연꽃 속에 차를 넣어서 특별히 향을 높인 차이다. 연차라면 흔히 연잎을 가늘게 잘라 말려서 만들거나 연꽃을 가지고 만든 차를 말하는데, 이곳의 연차는 연꽃에 녹차를 넣어 꽃잎으로 잘 감싼 후 냉동시켜서 사용하는 차였다. 차의 차가운 기운과 연의 뜨거운 기운이 잘 조화를 이룬 차이다. 쌍봉사의 연차는 차가 연꽃으로 승화함으로써 그야말로 선차일미를 연차일미로 승화시키는 것인가.
비록 조주의 법형제로서 차와 관련한 고사가 적기는 하지만 쌍봉사 주위에 차나무가 많은 것은 아마도 그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 촌로들은 아주 옛날부터 차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사자산문의 발원이 쌍봉에서 시작하였음을 철감의 탑과 비가 말해주고 있다. 선사의 부도탑은 868년(신라 경문왕 8년)에 그가 열반에 들었을 때 조성됐다. 조각의 솜씨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아름다움에 걸맞게 탑은 국보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석은 그의 뒤를 이은 수제자 징효대사 절중(折中·826∼900)이 문도들과 함께 진성여왕 5년(891년)에 건립하였다. 귀부와 이수만 남은 탑비도 보물 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당집(祖堂集) 권 17, 삼국사기 신라본기, 그리고 최하(崔賀)가 지은 ‘무주 동리산 대안사 적인선사비송병서’(武州 桐裏山 大安寺 寂忍禪師碑頌幷序) 등에는 철감의 다선일여의 정신과 쌍봉사의 내력을 전한다.
“선사의 휘(諱)는 도윤이요, 성은 박씨이며, 한주 후암인(현 황해도 봉산군) 사람이었다. 여러 대를 호족으로 지내온 집안으로 원성왕(元聖王) 14년(798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고씨가 꿈에 이상한 광채가 방안에 가득 비치는 것을 보고 놀라 깨니 태기를 느꼈다. 부부가 서로 말하기를 ‘꿈이 예사롭지 않으니 아들을 낳으면 승려가 되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 태기가 있은 뒤 16개월 만에 탄생한 철감은 일취월장하여 그 모습이 학과 같이 빼어났고, 봉황의 자태와 기동이 예사롭지 않고 풍채가 남달랐다. 그의 나이 18세 때에 양진에게 승려가 되기를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귀신사에서 출가, 10년간 화엄학을 익혔다. 이후 28세 때에 헌덕왕 17년(825년)에 사신행차하는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남전보원 선사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니 첫눈에 도가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우리 종의 법인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구나.’”(조당집 권 17)
오늘날도 이 일대에서는 차 민요가 전해진다.
“님아 님아 우리 님아/ 논갈이는 못하거던/ 차약이나 따러가는/ 내일 아침 애비 생일/ 동산 위에 해 뜨기 전/ 쌍봉사절 부처님께/ 차약 올려 수명 길게/빌어주소 어머니요.”
쌍봉산 자락에 수없이 펼쳐진 야생차밭을 뒤로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다성암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철감도윤에서 초의선사로 이어지는 다선의 경지를 생각해서 지은 암자라고 한다.
근래에 들어 쌍봉차라는 레테르가 생겼다. 쌍봉차의 부활은 중리에 사는 한 청년이 500여평의 차밭을 가꾸어 쌍봉차를 생산한 데서 비롯된다. 다선(茶禪)의 생명은 이렇게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살아난다.
철감도윤이 뿌린 다선의 정신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어져 새롭게 부활하여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라는 깃발로 재탄생하여 동아시아 차계를 주름잡고 있다.
중국에서도 잊혀진 조주의 츠차취 정신마저 한국의 차인 최석환씨의 손에 의해 다시 올려져 중국 전역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는 ‘천하 조주 끽다거’ 순례를 중국의 어떤 차인보다 먼저 감행함으로써 선차문화의 중흥에 있어 중국을 선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일들이 선차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린 구산선문 선사들의 원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주의 츠차취는 한때 중국 땅에서 버림받았으나 도리어 그의 법형제의 나라인 한국인의 손에 의해 부활하고 깃발을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동류지설(東流之說)’이 아니라 신라 무상스님의 ‘선차지법’이 중국 사천지방으로 서류(西流)하였듯이 선차의 깃발도 다시 중국으로 서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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