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영화는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현재의 아이들에게는 당면한 문제, 성인들에게는 과거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만한 이야기들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성인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순수한 세계를 바라보거나, 아이들의 시선으로 성인의 부조리한 세계를 바라보기도 하는 이중적 창구가 되기도 한다.
요즘 한국 영화계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성장영화 두 편이 나와 눈길을 끈다. 국내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르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완득이’(감독 이한)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으로 떠오른 ‘돼지의 왕’(감독 연상호)이 그 주인공들이다. 두 작품은 스토리나 메시지 면에서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학창시절의 쓰라린 추억, 그로부터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들춰낸다는 점에서 비교해볼 만하다.
두 영화는 모두 성장영화답게 학교를 주 무대로 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가정에서 벗어나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작은 사회이며, 처음 좌절과 시련을 맛보는 곳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성인이 되기 위한 올바른 지침을 제공해주기도, 또 어떤 아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비정한 현실이 되기도 하는 공간이 바로 학교다. ‘완득이’와 ‘돼지의 왕’은 전혀 다른 결말을 통해 이 양 극단의 경우를 대변한다.
설정된 시대는 분명히 다르지만 ‘완득이’는 가난하고 힘들어도 그래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은 던져주는 반면, ‘돼지의 왕’은 부조리한 현 사회에서 앞으로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좌절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 ‘완득이’ 교권 추락시대, 스승과 제자의 따뜻한 멘토링
김려령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완득이’는 소심한 반항아 완득이(유아인 분)와 그를 곁에서 묵묵히 이끌어주는 동주선생(김윤석 분)의 멘토링을 잔잔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척추장애인 아버지(박수영 분), 피도 섞이지 않은 데다 지능이 낮은 민구 삼촌(김영재 분)과 살아가는 완득이의 문제는 한 마디로 너무 가난하다는 거다. 아버지와 삼촌이 카바레와 재래시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봤자 근본적인 가난은 이들을 떠날 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때마다 완득이는 점점 세상과 등을 지게 된다.
하지만 누구보다 얄미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동주선생이다. “얌마, 도완득”을 시도 때도 없이 외쳐대고 수급품 찾아가라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 심지어는 옆집에 홀로 사는 탓에, 툭하면 수급품인 햇반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완득이는 매일 교회에 나가 “똥주(동주) 선생 좀 죽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동주선생의 폭정(?)과 간섭은 계속된다.
교권추락시대, 동주선생이 내뱉는 뼈같은 한 마디, 한 마디 대사들은 깨알재미를 선사한다. 자율학습시간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흐드러지게 잠을 자는가 하면, “뭔 놈의 학교가 이래? 될 놈만 야자 해야지…” “공부는 학원에서 해야지” “OO대 걔들 머리는 좋은데 싸가지가 없어”라며 현 교육제도를 비판한다. 말 듣지 않은 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지휘봉으로 때린다. 그걸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학생에게는 “신고해. 너희들 신고정신은 투철하잖아”라며 체벌 금지 제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비아냥거린다.
이렇게 불량스러운 교사임에도 동주선생의 진가는 교실 밖에서 발휘된다. 동주선생은 어떤 일이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생전 처음 보는 필리핀 어머니가 나타난 사건은 완득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큰일이었다. 하지만 동주선생은 그저 별일 아닌 듯 완득이가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곁에서 묵묵히 도와준다.
사사건건 나타나 참견하는 동주선생 때문에 처음에는 반감이 컸던 완득이도 점점 마음을 연다. 세상을 향한 분노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었던 반항아가 제법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줄도 알게 되고, 어머니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정을 꿈꿀 수도 있게 된 것. 스스로 알아서 했다기보다는 옆에 동주라는 든든한 멘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영화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도움의 손길이 작게나마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 ‘돼지의 왕’ 권력사회의 부조리… 돼지들의 비뚤어진 혁명기
독립 애니메이션계의 대표주자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1990년대 중학교를 배경으로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권력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청소년관람불가, 애니메이션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잔혹 스릴러를 표방한 이 영화는 죽어있는 한 여인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황경민(오정세 목소리)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중학교 동창인 정종석(양익준 목소리)을 찾아간다. 그리고 15년 전 중학교 1학년 때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도 작고 나약한 어린 경민(박희본 목소리)은 학교에서 늘 등치 큰 아이들의 성적 희롱과 폭력에 시달린다. 그를 지켜보는 종석(김꽃비 목소리)은 안타깝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중1 교실에서 권력을 쥔 아이들은 대개 공부를 잘하고 부잣집 아이들인 데다 등치도 커서 아이들을 쉽게 장악한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은 옆 반 ‘짱’, 2~3학년 형들과 유착돼 있어 어느 누구도 나설 수 없다. 교실 안에는 아이들에게 폭정을 휘두르는 권력층과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개들, 그리고 용기가 없어 방관만 하는 돼지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작은 교실 안에서 이뤄진다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암울한 세계는 이문열 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떠올리게도 한다. 오랜 독재정치의 역사는 아이들의 세계 또한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다.
당하고만 있던 경민과 종석에게 왕이 등장한다. 바로 철이(김혜나 목소리)다. 집을 떠나 있는 아버지, 노래방 도우미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철이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두려울 것이 없다. 경민과 종석은 그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나타나 구해주는 철이를 우두머리로 받든다. 하지만 철이가 택한 저항의 방법은 거칠고 무모했고, 점점 자신을 타락의 길로 내몰 뿐이었다.
그의 비뚤어진 혁명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질 길 없는 궁핍한 소외계층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어려운 자들을 더욱 핍박한다. 이는 1990년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회의 정체된 단면이다.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 안에서 피해자로 자라난 종석과 경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어서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릇된 그들의 성장기는 또 다른 큰 비극을 낳는다. 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좌절된 현실을 그냥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이유가 된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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