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 그것은 피로를 초래한다. 피곤한 것은 늘 수고를 강제하는 세계 안에서 그렇다. “세계, 그것은 그 안에서 ‘자아’가 봉급을 타는 범속한 세계”(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인 까닭이다. 일요일은 한 주일 동안의 노동과 그로 인해 누적된 피로에서 놓여나는 날이다. “피로가 존재에 대한 유죄 판결이라면, 피로는 또한 경직, 초췌해짐, 삶의 원천과의 단절”이고, “존재함에 대한 존재자의 지연되어 있음”(레비나스, 앞의책)이다.

일요일은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지는 까닭에 혼자 있는 고독조차 감미롭다. 일요일엔 누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는다. 일요일에 주체는 누구에게 소유되거나 지배될 수가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깊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도시를 버리고 숲으로 갔다. “천천히 살며 오직 삶의 본질만 마주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중에서 배우지 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마침내 죽게 되었을 때에야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 나는 숲으로 갔다.”(소로, ‘월든’)
소로에게 ‘숲’이 있었다면, 우리에겐 일요일이 있다. 일요일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랑과 향유를 만끽하고, 삶의 본질과 마주하고 그것의 내면을 꼼꼼하게 더듬어 살필 수 있는 시간이다. 일요일 정오 “요일 중의 요일, 가장 늦게 탄생한 요일들의 막내 자매, 모든 요일들의 여왕이자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날”(서동욱, ‘차이와 타자’)! 일요일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이 말은 먹고 마시며 즐길 시간이 그만큼 빠르게 줄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흐름을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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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償)의 선물처럼 주어진 일요일은 삶의 본질과 마주하고 그것의 내면을 꼼꼼하게 더듬어 살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일요일의 즐거움은 풍부한 음식의 향유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가 도구적 연관성의 총체이기 이전에 먹을거리의 총체라면,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음식의 즐거움 속에서 세계와 나의 유대를 강화할 수 있다. 풍부한 먹을거리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세계 내 존재로서 우리의 존재 기반을 단단하게 해주는 까닭이다. 텃밭에서 거둔 갖가지 신선한 채소들을 조리하고, 두껍게 자른 붉은 고기들을 불에 익혀 풍성한 식탁을 준비한다. 자, 먹고 즐기자.
“먹을거리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차지하는 지위 때문에, 그리고 특히 먹을거리가 드러내 주는, 욕망과 그것의 만족 사이의 관계 때문에 먹을거리의 예는 특권적이다. 욕망과 그 만족 사이의 완벽한 대응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욕망은 완벽하게 그것이 욕망하는 바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음식물은 욕망의 지향의 완전한 실현을 가능케 해준다.”(레비나스, 앞의책)
일요일 오후의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간들은 식후의 한가로움, 수다, 산책, 간식, 야구중계를 보는 것, 낮잠들로 쪼개진다. 포만감은 우리를 졸음에 빠뜨린다. 저마다 나무그늘 아래 놓인 안락의자나 거실의 소파 위에서 잠시 낮잠에 빠진다.
“잠잔다는 것, 그것은 심적이고 물리적인 활동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을 떠도는 추상적인 존재에게는 이 중지의 본질적인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그 조건이란 장소이다. 잠의 유혹은 자리에 눕는 행위 속에서 밀려든다. 자리에 눕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를 장소에, 자리에 제한하는 일이다.”(레비나스, 앞의책)
문득 낮잠에서 깨어난다. 빛으로 넘쳐나는 세상이 우리 눈앞에 있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욕망의 가능성으로, 그리고 욕망의 대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낙관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 앞에는 여전히 일요일의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펼쳐져 있다. 그 시간들은 봉급을 타는 범속한 세계의 시간이 아니다. 일요일은 비경제활동의 시간들, 한 주일의 노동과 수고의 대가로 주어진 여가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피로는 여전히 우리 존재의 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이것은 일요일 다음에 닥칠 월요일의 노동과 수고에 대한 압박이 드리운 그늘이다. 우리는 월요일에 불가피하게 범속한 세계로 떠밀려 나가야 한다. 일요일 오후의 돌연한 따분함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수고와 여가의 교대 속에서 우리는 수고를 통해 얻은 수확을 향유한다. 이 시간은 천편일률적으로 따분한 것인데, 그 까닭은 이 시간의 순간들 간에 서로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일요일로, 즉 그 안에서 세계가 주어지는 순수한 여가로 흘러간다. 일요일은 일주일을 성스럽게 하지 못한다. 그 대신 일요일은 일주일을 보상한다. 상황이나 존재에의 연루―이 연루가 수고이다―는, 현재 자체 속에서 회복되는 대신에 억압되고 보상되고 사라져 버린다.”(레비나스, 앞의책)
비록 일요일이 모든 시간들을 축성해서 성스럽게 만들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행복의 가능성에 대한 분명한 예시다. 수고와 봉급의 구조 속에서 벗어난 일요일 오후의 쾌락들은 우리가 삶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삶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밤이 내리면, 갑자기 작은 멜랑콜리가 쳐들어온다. 마침내 텔레비전이 참을 수 없어져서, 꺼버린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 때로는 어린시절까지 되돌아가기도 한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세며 걷던 산책길. 그 배경에 떠오르는 학창시절의 불안, 꾸며낸 사랑 이야기들. 무엇인가가 마음을 휘돌아 지나간다. 그 느낌은 여름 소낙비처럼 강렬하다. 불청객처럼 쳐들어온 영혼이 일으키는 이 작은 물결, 되돌아오는 익숙하면서 불편한 느낌. 그러나 그 느낌은 소중하다. 그것이 일요일 저녁이다.”(필립 들레름, ‘첫맥주 한 모금 그리고 다른 잔잔한 기쁨들’)
일요일 아침의 가슴을 충만하게 했던 기쁨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갑자기 일요일들은 아주 무력하게 월요일 아침 아홉시에 개시되는 노동과 수고의, 책임과 의무의 깊은 나락 속으로 가라앉는다.
일요일이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들 중의 평범한 하루가 되어 버림으로써 그것은 위안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존재의 도약대가 되지는 못한다는 점을 증명한다. 우리가 일요일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돌연한 씁쓸함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요일이 존재의 무거움을 견디게 하는 작은 구원이 시간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요일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여는 작은 문, 아니 그 문을 여는 손잡이다. 일요일에 존재의 느슨함에 머무르며 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피동성은 자기와 현재에 대해 지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일요일은 봉급과 수고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도록 주어진 자유와 부활의 시간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서동욱, ‘차이와 타자’, 문학과지성사, 2000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필립 들레름, ‘첫 맥주 한 모금 그리고 다른 잔잔한 기쁨들’, 김정란 옮김, 장락,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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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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