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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철의 시네 리뷰]­ ‘북촌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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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9-16 03:45:38 수정 : 2011-09-16 03: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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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막막
조금 편하게 말해 보자.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일은 즐겁다. 왜냐고?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는 순간이면 늘 기분이 묘하다. 된통 당한 느낌이다. 뭔가 알아내려고 애쓰지 말라는 영화를, 알아내봤자 별거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 영화를,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요리조리 잘라내고 꿰맞추며 의미를 발견하려 골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이미 늦었다.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이번에 만난 그의 12번째 장편영화, ‘북촌방향’도 예외는 아니다. 전혀 아니다.

영화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왜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 자꾸 인과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북촌방향’을 보고 나서는 증상이 더 심해진다. ‘존재와 시간’, ‘차이와 반복’과 같은 이름 있는 철학자들의 어려운 개념들이 이 영화와 꽤나 잘 어울려 보인다. ‘우연성에 기댄 불가지론’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이 영화를 설명해 보겠다는 야심찬 기획이 머리를 쳐들기도 한다.

홍상수는 분명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어쩌면 홍상수의 관념에는 영화를 사고하는 철학적 범주들이 이미 고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영화가 개별적으로 지닌 본질적 차이에도 늘 같은 느낌으로 전달되는 결정적인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매번 비슷해 보이지만 매번 크게 다르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시간’이 존재하는 방식이 우리가 목격하는 실체적 진실과 기억 사이에서 어떻게 우연적이고 비균질적으로 작동하는지 전작들에 비해 훨씬 흥미롭게 펼쳐진다.

혹은 이런 일도 생긴다. 생뚱맞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식민지 시대의 시인 이상(李箱)이 나타나기도 한다. ‘오감도’에서처럼 ‘북촌방향’의 골목은 막혀 있기도 하고 뚫려 있기도 하다. 사실은 어떤 골목이 적당한지 의미가 없다. 재생과 반복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지만 그 차이는 불투명하다.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골목에 갇힌 ‘오감도’의 아이들처럼 눈에 들어온다.

또한 이 영화에 나오는 ‘소설’이라는 술집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과 ‘무진기행’이 하나로 혼성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울과 겨울, 그리고 통속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위선들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고 엇갈리는 풍경들이 자꾸만 겹친다. ‘북촌방향’의 ‘방향’은 ‘무진기행’의 ‘기행’과 교묘하게 섞이고 엇갈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러한 모든 감각적 행위들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 영화는 의미를 생성하는 선형적 시공간을 무화시켜 모든 걸 원점에 놓고 다시 되돌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의미의 열린 공간을 제공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의미는 이미 증발된다.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미궁으로 빠져든다. 밤새도록 도깨비와 싸웠는데도 다음날 보면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쓰러져 잠들어 있는 옛이야기 속 나무꾼처럼 제자리만 뱅뱅 맴돈 셈이다.

이렇게 이 영화에 대한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짙은 허무와 쓸쓸함만이 남는다. 이 영화, ‘북촌방향’의 시공간은 이런 기분에 딱 적합하다. 북촌의 골목, 정독도서관, 밥집, 술집,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겨울을 밝히는 환한 추위, 눈 내리는 새벽, 택시를 잡는 취객들. 북촌의 겨울이 빚어내는 풍경과 그 이미지들이 홍상수 감독이 진정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주인공 성준(유준상)처럼, 가도 가도 결국 원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살아내야 하는지 막막하고 난감하다. 홍상수는 알고 있을까. 아니다. 그도 분명 모를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를 기다린다. 무슨 해답이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生)을 잘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을 그의 영화가 정직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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