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상(67)씨는 광복절을 앞둔 14일 러시아 사할린으로 출국한다. 일제 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가 현지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여정이다. 올해 86세인 어머니 라준금씨도 동행한다.
류씨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면서기들에게 이끌려 사할린으로 떠났다. 당시는 일제가 조선에서 전쟁 물자와 인력을 대거 공출하던 때였다. 류씨는 두 살이었고,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류씨는 "나중에 할머니께서는 '금방 갔다 올 줄 알았지 이렇게 아주 안 올 줄 알았나'라며 가슴을 치시곤 했다"면서 "반년만 버텼으면 모국에서 해방을 맞으셨을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고 8일 말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해방이 되고도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패전국인 일본은 사할린의 자국민을 배로 귀국시켰으나 한국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배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났지만 한국과 소련은 적대국이서 한국 정부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를 데려올 방법이 없었던 거죠. 한국에서 배가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하셨을지…."
6ㆍ25를 겪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와중에 아버지의 부재는 류씨에게 무척 큰 한이 됐다고 한다. 류씨는 "그래도 전쟁 때 돌아가신 것이 아니니 언젠가는 뵐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1976년 류씨에게 편지 한 통이 전해졌다. 수신자는 작은아버지였는데 발신자는 다름 아닌 류씨의 아버지였다. 일본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과 연락하던 한 단체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한국으로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의 첫 편지를 받고 어머니와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현지에서 찍은 사진까지 동봉하셨더군요. '31년간 홀몸으로 살고 있다'는 글귀에 어머니는 '주변머리도 없는 사람'이라며 안타까워하셨죠."
류씨는 즉각 단체를 통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고, 아버지 역시 반가움에 가득 찬 답장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누차 편지를 보냈으나 답신이 없더니 이듬해인 1977년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이후로는 '아버지 얼굴을 뵈었으면' 하는 바람이 '아버지 산소만이라도 찾았으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냉전 종식 후인 2006년 류씨는 사할린에서 영주 귀국한 동포들이 사는 경기도 안산 '고향마을'을 찾아 아버지를 아는 이들이 없는지 묻기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이듬해 광복절 어머니와 함께 그들을 따라 사할린을 처음 찾았다.
"아버지는 코르사코프 공동묘지에 묻히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망우리 공동묘지만 한 곳에서 아버지 산소를 금방 찾아낼 수는 없었죠. 결국 평평한 곳 아무 데나 골라 제사상을 차리고 어머니와 울며 절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지난해 12월 인터넷에서 사할린 관련 기사를 검색하던 류씨는 사진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코르사코프 공동묘지의 한 한인 묘지를 찍은 사진 속 비석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사망 연도가 새겨져 있었다.
사진은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제공한 것이다. 위원회는 2007~2009년 3차례에 걸쳐 사할린 현지에서 한인 묘지 실태 예비조사를 하면서 이 사진을 찍었다.
위원회를 찾은 류씨는 자초지종을 전해듣고 아버지 산소의 대략적인 좌표까지 입수할 수 있었다. 4년 만에 노모와 다시 사할린을 찾으려는 그에게 자녀들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장비를 사서 건넸다.
류씨는 "수많은 사진 가운데 아버지 묘소 사진이 우연히 기사에 첨부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며 "위원회에서 좌표와 함께 대략적인 위치를 찍어 준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묘소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아버지 없이 한 맺힌 세월을 보내면서 국가가 아버지를 버린 것 아니냐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죽어서라도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어머니를 위해 정부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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