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의 개발자는 하이럼 맥심(Hiram Maxim·1840∼1916)이다. 뉴욕을 전기조명으로 밝히고 전구의 발명특허를 두고 에디슨과 싸우기도 했던 미국 출신 발명가다. 1882년 영국에 거주하던 맥심은 유럽인들에게서 ‘발명으로 돈을 벌려면 서로 죽이는 데 효과적인 물건을 만들어 내면 된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듣게 된다. 그리고는 소총을 사격할 때 생기는 강한 반동을 이용해 탄환을 재장전함으로써 연속사격이 가능한 총기 고안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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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기 시대를 연 맥심 기관총. 이 기관총 등장 이후 전쟁 사망자 수는 수만명 규모로 늘었다. |
1885년 첫선을 보인 맥심 기관총은 분당 650발의 총탄을 쏟아냈다. 가벼운 데다 분해가 쉬워 야전에서 총기 손질·수리에 훨씬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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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럼 맥심이 자신이 발명한 맥심 기관총을 붙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20세기에 접어들어 사용된 맥심 기관총은 공포스런 성능을 자랑했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1904년 8월∼1905년 1월)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맥심 기관총 및 야포의 십자포화 앞에 곤욕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사상자는 2만8200명인 데 비해 일본군 사상자는 5만7789명에 달했다.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보다 2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상당수가 맥심 기관총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세계대전에서 맥심 기관총에 의한 대량살상이 이어졌다. 1916년 7월 제1차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하루 만에 무려 5만7470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중 90%가 독일군 맥심 기관총에 의한 것이었다.
맥심 기관총의 출현으로 보병 전술에도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전까지 대열을 갖춰 정면 돌격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보병들은 살아남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을 파야 했고, 전쟁은 지루한 참호전 양상으로 변해갔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신무기의 개발을 독촉했다. 신병기의 이름은 바로 전차였고 영국군 마크(Mark)-1 전차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박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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