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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기 이야기] <14>세계의 명품 소총 ②보병을 참호로 밀어넣은 '맥심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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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7-27 22:56:27 수정 : 2011-07-27 22: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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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반동으로 탄환 재장전… ‘가공할 성능’ 자랑 전쟁의 양상을 바꾼 소화기를 꼽을 때 ‘맥심 기관총’을 빼놓을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자동기관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 6월25일 소련제 M1910 맥심 기관총을 들고 남침한 북한군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우리 국군에게는 아픈 상흔이기도 하다.

이 총의 개발자는 하이럼 맥심(Hiram Maxim·1840∼1916)이다. 뉴욕을 전기조명으로 밝히고 전구의 발명특허를 두고 에디슨과 싸우기도 했던 미국 출신 발명가다. 1882년 영국에 거주하던 맥심은 유럽인들에게서 ‘발명으로 돈을 벌려면 서로 죽이는 데 효과적인 물건을 만들어 내면 된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듣게 된다. 그리고는 소총을 사격할 때 생기는 강한 반동을 이용해 탄환을 재장전함으로써 연속사격이 가능한 총기 고안에 나섰다.

자동화기 시대를 연 맥심 기관총. 이 기관총 등장 이후 전쟁 사망자 수는 수만명 규모로 늘었다.
총의 반동으로 실탄을 장전하고 쏜다는 맥심의 발상은 당시로선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탄환이 발사될 때 발생하는 반동을 스프링과 지렛대를 움직이는 에너지로 사용해 후속탄이 재장전되는 자동사격 방식을 고안해 냈다. 또 총탄을 나란히 연결한 탄띠로 약실에 탄을 공급해 기존 수동식 기관총의 송탄 불능 현상을 극복했다. 여기에 빠른 발사 속도로 쉽게 가열되기 쉬운 총신을 식히기 위해 물로 채운 덮개를 총신에 붙이는 수냉식 냉각법을 채택했다.

1885년 첫선을 보인 맥심 기관총은 분당 650발의 총탄을 쏟아냈다. 가벼운 데다 분해가 쉬워 야전에서 총기 손질·수리에 훨씬 유리했다.

하이럼 맥심이 자신이 발명한 맥심 기관총을 붙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887년 맥심은 자신이 개발한 신무기를 들고 유럽을 순회하면서 시범을 보였다. 유럽 군인들은 맥심 기관총이 만들어내는 소나기 같은 탄막(彈幕)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1888년 11월 맥심 기관총은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향해 발사된다. 프랜시스 드 윈튼 경이 이 기관총을 구매해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총알 비’를 퍼부은 것이다. 1890년에 맥심은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위스 등에 이 자동기관총을 납품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사용된 맥심 기관총은 공포스런 성능을 자랑했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1904년 8월∼1905년 1월)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맥심 기관총 및 야포의 십자포화 앞에 곤욕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사상자는 2만8200명인 데 비해 일본군 사상자는 5만7789명에 달했다.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보다 2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상당수가 맥심 기관총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세계대전에서 맥심 기관총에 의한 대량살상이 이어졌다. 1916년 7월 제1차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하루 만에 무려 5만7470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중 90%가 독일군 맥심 기관총에 의한 것이었다.

맥심 기관총의 출현으로 보병 전술에도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전까지 대열을 갖춰 정면 돌격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보병들은 살아남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을 파야 했고, 전쟁은 지루한 참호전 양상으로 변해갔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신무기의 개발을 독촉했다. 신병기의 이름은 바로 전차였고 영국군 마크(Mark)-1 전차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박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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