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극중 17살의 초임병 남성식 이병이 북측의 전문 저격수 ‘2초’의 눈에 걸렸을 때, 악어부대원들은 그를 희생양으로 바친다. ‘2초’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선 총성이 조금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2초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발을 쏘는 이유도 비슷하다. ‘2초’는 남성식을 미끼로 잔병들을 소탕해야 한다.
누군가 도와줬더라면 살 수 있었던 남성식은 ‘2초’를 쫓는다는 명분 아래 죽는다. 김수혁은 말한다. ‘2초’를 잡아야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오늘의 남성식은 어제도, 그리고 지난달에도 있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논리는 ‘애록고지’를 사이에 두고 협상 테이블에 앉은 남과 북 담당자들의 대화와 똑같다. 그들은 말한다. ‘애록’에 따라 경계선이 달라지니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나간다 해도, 애록을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애록’을 차지해야 하는 데에는 ‘영토’라 불리는 경제학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민족이나 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들은 ‘애록’에 없다. 일년에 300번 정도 주인이 바뀌는 애록은 단지 중요 협상 의제일 뿐이다. 경제수역을 두고 갈등하는 인접국가들처럼 ‘휴전’이라는 정치적 사안을 두고 양 국가가 ‘애록’이라는 경제적 게임을 하고 있다.
‘고지전’의 새로움은 바로 이 접근에 있다. 지금까지 한국 전쟁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격정액션멜로로 그려졌다. 전쟁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인, 형제, 자매, 부모와 같은 이야기들이 전쟁의 비참함과 한국사의 얼룩을 조명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면 ‘고지전’은 전쟁을 민족 단위의 내전이라기보다 지도층의 정치적 의도와 그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
‘고지전’의 또 다른 새로움은 이 경제학을 토대로 인간의 생존이라는 문제를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중요한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포항 전투의 기억은 우리가 지금껏 영화에서 봤던 전우의 개념을 뒤집어 놓는다. 살기 위해서는 대의나 윤리가 없다. 장훈은 이 지독한 생존의 논리를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전개한다.
‘영화는 영화다’나 ‘의형제’처럼 이 영화 역시 두 남자이야기, 버디 무비라고 할 수 있다. 두 남자는 우연히 같은 공간에 머물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고지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내가 과연 살아 있는지, 이곳이 점령한 곳인지 당한 곳인지 혼동된다고 고백한다. 이는 매일 귀속 국가가 달라지는 ‘애록’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 전쟁을 할까. 극의 초반 북한군 장교는 우리는 왜 전쟁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장 처참한 몰골로 전사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말을 활용하자면, 가장 훌륭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은 전투이다. 목숨 걸고 싸우느니 목숨 보전하며 그저 사는 게 더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고지전’의 영화적 시각이 스펙터클로 전시된 전쟁이 아니라 혼동과 두려움에 빠진 개인의 시선과 더 닮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수백, 수천만명의 중공군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군인들, 한쪽 팔을 다친 줄도 모르고 모르핀 주사를 맞아대는 장교, 이 살풍경이야말로 전쟁의 스펙터클이니 말이다. 전쟁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한 사람, 한 인간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 전쟁경제학은 냉정하고 차갑다. 뜨거운 전쟁 영화에 익숙해 있던 한국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영화평론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