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향기롭게 가꿀 주역 키우자 연둣빛 나던 신록이 푸르러졌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인지 싱그러운 내음도 짙어졌다. 아름다운 봄, 산과 들에 생명의 기운이 넘쳐난다. 이 절기에 우리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이한다. 가정의 달 5월이다. 자녀와 부모가 함께 서로의 소중함을 음미해볼 만한 때다.
1920년대 초 일제 치하의 암울한 때 어린이날을 만들고 아동교육 운동에 몸을 바쳤던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이렇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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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영 대기자 |
어린이 터주론, 어린이 호주론은 ‘어른 공경’을 강조하던 시절에 참으로 선구적인 주장이었다. 그가 본 어림(幼)의 뜻은 어리석음(蒙)이 아니라 크게 자라날 어림이요, 새로운 큰 것을 지어낼 어림이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20년, 30년 새로운 세상을 지어낼 새 밑천을 가진 존재였다. 어린이는 부모의 물건이 아니며 기성사회의 주문품(注文品)도 아닌, 한없이 존귀한 존재였다.
소파에게 교육의 본령은 지식교육이 아니었다. 어린이를 독특한 개성체로, 본바탕을 잘 키워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그는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고 어린이 잡지를 만드는가 하면, 상상력과 창조성을 키우는 동요와 동화, 소년 단체활동 등을 권장하며 ‘어린이 섬기기’에 앞장섰다.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앞으로 뻗는 씩씩한 원기’가 넘치고 모험의 기상과 의협의 정신이 충만하기를 희구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교육환경이나 생활여건은 소파가 활동했던 1920년대에 비하면 훨씬 윤택해졌다. 그렇다면, 그의 교육사상과 실천운동의 목표는 오늘의 교육현장에서 제대로 성취되고 있을까? 학교 교육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씩씩한 원기’를 북돋아주고 모험과 의협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을까. 지덕체의 고른 성장에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까. 우리의 교육은 과연 발전한 것일까.
현실은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퇴보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부모들은 성적에 더욱 연연하고, 밤 늦도록 아이들을 학원에 얽매어 놓고 있다. 이른바 명문 중고교나 명문대 진학을 위해 ‘머리’만 키우는 각박한 생활로 내몰고 있다. ‘가슴’으로 ‘몸’으로 느끼는 인성교육의 기회는 빈곤해졌다. 청소년을 온통 어른들의 주문 생산품으로 양산하는 실정이다.
오늘 우리 기성세대는 어린이 터주론을 새롭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어리고 철없는 존재가 아니다. ‘역사의 나이’로 보면 어린이야말로 어른들의 어버이다. 역사라는 큰 나무에 달린 열매! 그 열매의 나이를 어찌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 때부터 따져야겠는가. 어린이는 어른들의 보살핌과 사랑은 물론 조상들이 땀 흘려 가꾼 문화유산의 진액을 먹고 성장한다. 그들이 누리는 첨단의 과학기술과 문명의 혜택은 장구한 역사를 거쳐 상속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어버이 세대의 유산보다 훨씬 방대하고 심오하며 정교하다.
유전학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의 몸에 깃든 유전자는 부모에게서만 물려받은 게 아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온 유전인자의 조합이다. 그들의 몸은 조상들 몸의 연장이다. 역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그들은 인류사의 뿌리에까지 연결된 존귀한 존재이다. 단군 할아버지보다 오히려 반만년쯤 더 나이가 드신 분들이다. 이들은 옛 사람이 누리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지하철과 비행기 등등. 어른들이 다루기 어려워하는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도 이들은 척척 다룰 줄 안다. 역사의 나이가 많은 덕택이다.
드넓은 세상, 새로운 역사를 이끌 어린이님들을 학교 성적과 입시, 취직이라는 비좁은 ‘틀’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기성세대의 짧은 안목으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부디 삶의 지혜를 가꿀 수 있게 하라. 자신의 개성을 가꾸며 생활 속에 즐거움과 재미를 한껏 느끼게 하라. 이웃과 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가꾸는 주역이 되게 도와주시라.
어버이 모시는 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면, 어른의 어버이 어린 님을 모시는 것, 어린 후배들을 잘 모시는 것은 역사를 위한 도리이다.
차준영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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