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느낌까지 전달하는 점자 외국인들 사로잡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8세기 중엽 추정)과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直指, 1377년)를 보유한 민족이다. 팔만대장경과 조선왕실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인류의 보물이 됐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지난해 직지보다 최소 138년 앞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은 실물 활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해 학계에서 논란 중이다. 어쨌든, 이쯤되면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의 인쇄종주국이다. 하지만 이런 명성을 잇는 인쇄 기술, 인쇄 업적, 인쇄인이 나왔다는 소식은 그동안 접하지 못했다. 과거만 화려하면 뭣하랴.
그런데 이번 2011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했다. 한국의 인쇄인들이 세계의 내로라하는 출판·인쇄 바이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대한민국 인쇄물 수출 1위 기업 ‘팩컴코리아(Pacom Korea)’와 해외 인쇄물이 수주 물량의 90% 이상인 창업 3년차 인쇄 및 팝업북 제작사 ‘서강프린팅(서강PPP)’,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은 미답지를 개척하는 촉각(점자)도서와 큰글씨체 도서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도서출판 점자’ 등의 부스엔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슨 비결이 있기에 이들 부스에 자존심 강한 서양인들이 몰렸을까.
![]() |
김경수 팩컴코리아 대표 변완수 서강프린팅 대표 육근해 도서출판 점자 대표 |
“중소기업이고 인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라 잠깐 고민했지만 입사 후에는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일했습니다. 사장이 꿈이었지요.”
그는 입사 6년 만인 94년 미국 현지법인 총괄이사, 98년엔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초고속 승진은 입사 후 매년 2배 이상씩 성장한 인쇄 수출 실적 덕분이었다. 그만큼 수출이 잘 됐다.
“미국에서 근무하면서 세계 인쇄 시장의 규모를 확인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세계 인쇄 시장 규모는 우리의 예측을 초월합니다. 미국 한 나라의 인쇄 시장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1년 총예산인 300조원을 초월합니다. 세계 500대 기업 중에도 5개가 인쇄회사입니다.”
청첩장이나 찍는 충무로 인쇄소를 인쇄의 모든 것으로 인식하던 시절, 김 대표는 이미 무궁무진한 세계 인쇄 시장에 눈을 뜬 것이다. 미국 최대 출판사 스칼라스틱, 미국 최대 건설회사 갠슬러, 미국 은행 월스파고뱅크, 영국의 테임스&허드슨 출판사, 프랑스의 아쉐트 출판사, 스웨덴의 자동차회사 볼보, 프랑스 패션회사 루이비통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팩컴코리아 거래처다. 나라별로도 미국·영국 포함, 독일·프랑스·이탈리아·호주·뉴질랜드·캐나다·멕시코·아르헨티나·브라질 등 15개국과 거래하고 있다. 직원 210명 중 해외업무 담당자만 25명이나 된다. 명실공히 수출 지향 기업인 셈이다.
“외국 바이어들이 우리 회사를 찾는 이유는 물론 인쇄의 품질 때문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납기일 잘 지키는 것과 서비스에 있습니다. 제품에 하자가 발생하면 고객이 발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야기하고 조치를 취합니다. 만일 배송 중이라면 전량 폐기하고 다시 인쇄해 보내줍니다.”
세계 최고 품질이라는 까다로운 요구를 모두 수용한 팩컴코리아는 그래서 지금은 ‘믿고 맡길 수 있는 확실한 인쇄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경험을 통해 “물고기가 많은 곳이라야 물고기가 잘 잡힌다”는 지론을 갖게 됐다는 김 대표는 “한국 인쇄업의 활로는 해외 수출에 있다고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인쇄회사로 시작한 서강프린팅(대표 변완수·43)은 2년 전부터 향후 회사의 주력 업종을 ‘팝업북’으로 옮기기로 결단했다. 변완수 대표는 “스마트폰 등 디지털 환경의 급속한 확장에 영세 인쇄소가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오래 살아 남을 콘텐츠를 찾다가 ‘직접 만지고 느끼고 만들어보는, 디지털이 줄 수 없는 아날로그의 세계, 즉 감성이 다른 DIY 팝업북에 올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부스를 설치해 외주사와 협력해 개발한 DIY 팝업북(1종만 완제품이고, 개발 중이던 19종은 견본) 20종을 선보였다. 액수(1만달러)는 크지 않지만 브라질과 첫 계약하는 성과도 있었다. 두 번째로 참가한 이번 볼로냐도서전에선 프랑스·이탈리아·미국·네덜란드·스페인 등 5개국에서 출판을 타진해 와 협상을 진행 중이다.
“우리가 개발한 DIY 팝업북은 아이들이 스스로 팝업북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창의성이 담겼습니다. 우리나라 엄마와 아이들은 이미 다 만들어진 기성 팝업북에 길들어져 있습니다만, 서구인들은 DIY 팝업북에 매우 큰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분야의 발전 여지가 매우 크다고 확신합니다.”
![]() |
출판 바이어들로 북적이는 2011 볼로냐아동도서전 영미관 부스. 외국 바이어들은 예년엔 저작권 등 일방적인 콘텐츠 제공자였지만, 올해부터는 그림책·만화·점자·인쇄·팝업북 등 세계 수준의 우리의 콘텐츠를 수입해 가는 고객으로 자리바꿈하고 있다. |
“우리 회사의 목표는 장애와 비장애 모두에게 보편적 정보 제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공공시설이나 학교, 가정 등에서 장애와 비장애가 같은 책을 보고, 같이 토론하고,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도서출판 점자는 2006년 일자리 창출 회사로 시작돼 2009년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됐다. 45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독수리 깃털, 물고기, 뱀 등 다양한 동물들의 피부가 첨가된 ‘터치미’를 비롯해 전래동화 ‘햇님달님’, ‘선을 따라서’, ‘세계의 명화’ 등 현재 20종을 개발했다. 지난해 처음 참가한 도쿄도서전에서 ‘터치미’를 일본과 100만엔에 계약했다. 이번 볼로냐에선 프랑스·네덜란드·러시아·오스트리아 등 5개국이 관심을 표명해 협상 중이다. 폴란드에선 샘플북을 구입해 갔다.
한때 대학교수로 재직한 육 대표는 “점자 책 제작에 몰두하기 위해 대학 교수직을 포기했다”며 “교수가 되려는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은 데 반해 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을 만드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므로 결단했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노동부 지원금 포함 총 9억원의 매출을 올린 도서출판 점자의 올해 매출목표는 20억원이다. 그중 절반은 해외 수출에 기대를 걸고 있다. “많은 콘텐츠를 보유한 기존 출판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육 대표는 즉석에서 ‘북극곰 코다 첫번째 이야기-까만코’라는 그림책 한 권만 가지고 부스를 지킨 도서출판 북극곰(대표 이순영)과 콘텐츠 교류 체결을 맺는 성과도 올렸다.
볼로냐(이탈리아)=조정진 기자 jjj@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