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파도 넘게 인류애 실천을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 대지진 소식을 듣고, 그 참상의 그림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몇 대 세게 얻어맞고 정신이 멍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런 줄 몰랐지?’하는 지구의 성난 말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나는 이 지구라는 공간은 아주 굳건하며 확실하다는 전제 위에서 온갖 고민을 혼자 다 하며, 마치 지구 위에 두발을 딛고 선 나의 삶은 아주 튼튼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 점에 대해서 추호의 의문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유식한 채 종말론을 들썩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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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동아대교수 |
지구 자전의 축이 흔들렸으며 일본 열도가 몇 센티미터나 옆으로 물러앉았다니! 대재앙을 맞은 일본 열도의 실종 사망자 수가 수만 명에 이른다니! 이 삶의 불확실함을 어쩔 것인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일찍이 그의 장시 ‘J. 앨프리드 프루프록의 戀歌’에서 ‘나는 커피 스푼으로 내 생애를 되질해버렸네/ 먼방에서 들려오는 음악 속에/ 종지로 작아져 가는 목소리들을 알고 있기에./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으랴?// 라고 노래했었다. 나도 어찌어찌 살다 보니. 내가 어찌해볼 수 있으랴 라고 늘 중얼대면서 커피 스푼으로 되질한 인생이었다는 자책이 심하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손을 놓고만 있을 수 있는가. 바로 옆나라가 그렇게 자연의 재앙 앞에서 쑥대밭이 되었으니.
지구는 여전히 우리의 출발지이며 도착지라는 생각을 다시 한다. 지구 위에서 생명들은 따뜻한 모포처럼 온갖 차디찬 것을 뒤덮으며 함께 걸어온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며 인류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다. 지진 앞에선 ‘커피 스푼으로 되질하는’ 자들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따뜻이 걸어오는 찬란한 내일들, 분명 빛을 품고 있는 부드러운 새벽들, 지구라는 정원의 흙 밑에 생명을 안고 숨어 흐르는 무수한 시작들. 그 따뜻함이 넘쳐넘쳐흘러 삶의 강을 향하여 달려감을 검은 파도 앞에서 우리는 만져본다. 여기서 끝은 언제나 시작이며 시작은 다시 시작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불멸할 것이다. 아마도 쓰나미는 인간들의 지나친 개발이라는 것으로 성한 데가 없는 몸을 끌고 가느라 고단한 지구가 잠시 벌떡 일어나 앉은 것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지구, 그는 벌떡 일어나서 지금 일갈(一喝)하고 있다. ‘너희들은 하나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하나의 종(種)이다. 종이라는 그 나무에서 끊임없이 종을 생산하고 있는.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일본 열도의 대지진이라는 재앙 앞에서 오히려 ‘봄 햇빛 같은 연결’의 인터넷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 연결의 인터넷 속에서 서로 도우며 가슴을 덥히는 잠시 뒤면 지구는 더 봄길이 될 것이다.
이 길 위에선 추락하는 나뭇잎은 상승하는 나뭇잎이 될 것이다. 모든 추락이야말로 상승을 준비하는 법이 아닌가. 지구라는 자궁의 양수 위에서 모든 검은 파도는 곧 생명이 되리라. 모든 추락은 우리가 서로의 손을 덥히고 이는 한 상승이 되리라.
지금 피 흘리는 일본을 돕자. 일본 열도의 부러진 허리 밑에 따뜻한 모포를 깔아주자.
우리 인류에겐 불운을 행운으로 만드는 힘이 있지 않은가!
강은교 시인·동아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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