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한자 이야기

관련이슈 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입력 : 2011-02-23 21:41:58 수정 : 2011-02-23 21:41:58

인쇄 메일 url 공유 - +

東亞문명의 정수 ‘한자’ 지난 5000년간 韓·中·日 공용어 역할
〈비한자 세대〉

“사전을 통해 뜻과 음을 찾아보려 해도 부수조차 모르니 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의 한자사전에 없는 단어도 왜 그리 많은지, 누구에게 묻기 전에는 알 수가 없어요.”

“쓰는 것은 포기하고 회화로만 버텨요.”

“누가 일본 한자 해석이라도 해 달라고 하면 바로 도망쳐요.”

〈한자 세대〉

“아는 한자이지만 훈독(訓讀)에서 음독(音讀)에 이르기까지 한자를 읽는 방법이 너무 다양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읽는 방법만이라도 한자 옆에 조그맣게 병기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것도 없으면 그냥 우리 음으로 읽어버려요.”

“한자로 된 인명, 지명은 어떻게 읽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요.”

◇도쿄 진보초(神保町)의 한 고서점 앞 도서 진열대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다른 책들도 제목이 전부 한자로 쓰여져 있는지라 한자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2006년 미국 국무부가 전 세계에 파견 근무 중인 외국어 보직자 2832명을 대상으로 69개에 달하는 외국어를 분류한 적이 있다. 난이도에 따라 ‘기타 언어’를 포함해 가장 쉬운 ‘세계어’에서 ‘고난도 언어’를 거쳐 ‘초고난도 언어’에 이르기까지 4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그런 미 국무부의 분류 기준에서 ‘초고난도 언어’로 꼽힌 4가지 언어가 있었으니, 바로 한국어와 중국어, 아랍어와 일본어였다. 그러고 보니 모두 동양어인 데다 세 개는 극동어이니 결국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권은 한·중·일 삼국이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이 음의 높낮이와 끝도 없는 한자 가짓수로, 한국은 기하학적 모양의 한글과 띄어쓰기로 외국인들을 골탕먹인다면, 일본은 단연코 한자의 음독과 훈독으로 세계인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그럼 한·일 양국 간은 서로의 언어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어려워할까? 한국인들에게 있어 일본어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사실이듯, 일본인들에게도 한글은 무척이나 어려운 초고난도 언어다.

이에 관한 필자의 에피소드 한 가지. 도쿄 체류 당시 일본어 수업을 듣던 어느 날, 한자 읽기로 고전하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해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저는 일본어 배우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혹시 한글을 배우신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만, 어려워서 포기했어요.” ‘어라?’ 한글이 어렵다는 의외의 반응에 깜짝 놀란 필자.

◇도쿄 순환선에 해당하는 야마노테(山手)선 전동차 안에 설치된 모니터. 봄철이 다가오면서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한자만 이해한다면, 꽃가루가 자주 발생하는 날로 1) 맑은 날 기온이 높거나 2) 공기가 건조한 가운데 바람이 강한 경우, 또는 3) 비가 내린 다음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 한글이 어려울 게 있나요?” “물론입니다. 한자가 하나도 없으니 읽는 것은 금방이지만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한자 없는 단어들을 그대로 다 외워야 하니 어려울밖에요.” 순간, 무엇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진 가운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과서와 신문, 교통표지판과 지하철 등 주변에서 시나브로 사라져버린 한자들이 떠올랐다.

사실이 그랬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한자 없는 한글은 의미를 상실한 표음문자에 불과했다. 마치 영어의 ABC처럼 완전히 다른 언어권의 글자였기에 이웃에 위치해 있지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문자가 ‘한글’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일본어를 몰라 고생했지만, 길거리와 지하철, 학교와 관공서에 표기된 한자어를 통해 의미를 이해하고 목적지를 찾아가며 일 처리를 진행했던 도쿄 정착 초기의 경험이 생각났다.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라는 일본인 학자가 있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일본에선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는 대학자다. 그런 그가 학명(學名)을 떨친 계기가 바로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의 편찬이었다. 1928년부터 1960년까지 장장 33년간에 걸쳐 5만여 개의 한자어를 총정리한 모로하시 데쓰지의 ‘대한화사전’(13권)은 출간 당시 세계 최초이자 최고 수준의 한자사전이었다.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희대의 업적. 그런 모로하시 데쓰지의 ‘대한화사전’이 중화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화권 한학자들은 한자어 사전 제작에 박차를 가하며 25년이 지난 뒤 대만이 먼저 5만 단어로 구성된 7권짜리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을 내놓기에 이른다. 중국 역시 이에 질세라 대만이 사전을 편찬한 지 9년 뒤 5만6000자로 이뤄진 13권짜리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을 발간한다. 한국은 2008년 한자사전 발간을 둘러싼 대경주의 마지막을 장식한 상태. 무려 38년간에 걸쳐 단국대 동양학연구소가 6만여 개의 한자와 50만여 개의 한자 어휘를 수록한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을 발간한 것이다. 더불어 가장 풍부하고 가장 정교한 한자사전을 세계 최초로 디지털화하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어느 건물 벽에 붙여진 ‘낙서 금지’ 표지판. 일본어를 몰라도 “낙서 행위에 따른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바, 미관을 해치는 낙서를 행하다가 발견될 경우에는 벌금 2만엔을 물린다”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겐 ‘검은 것은 종이요, 흰 것은 글씨’에 불과하겠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후발주자임에도 현재는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한국의 사전적 위상과 달리, 실생활에서 한자 사용은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꼴찌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모국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은 2136개 상용한자를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집어넣음으로써 기본적인 한자를 전 국민에게 가르치고 있는 까닭에서다. 반면 한국은 한자교육이 교과과정에서 아예 사라졌다가 선택과목으로 재등장하는 등 영욕과 부침 속에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돌이켜 보면 동아시아 문명의 정수인 한자는 지난 5000년 동안 한·중·일 3국의 공용어였다. 하지만 관용적인 의미에서의 한·중·일 3국이지 실제로는 몽골과 거란에서 여진과 돌궐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는 국제어가 한자였다. 당시의 중화권이 세계의 전부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한자어는 동아시아의 세계어였던 셈이다. 인종과 국가,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필담(筆談)만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시대 상황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례로 일본어 한마디 못하는 조선의 통신사들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일본 유학자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지장 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럴진대, 작금의 ‘한자 불용론’과 ‘한문 퇴출론’은 장구한 동아시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매우 편협한 조치라는 생각이다. 무수한 난관들이 놓여 있긴 하지만 공용 한자어를 제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한·중·일 3국의 노력 역시 그 같은 예단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는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간의 문화적·정서적 간극을 좁힐 최고의 외교 무기라는 생각이다. 네덜란드와 스위스, 벨기에와 덴마크 같은 소국들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국어 교육에 남달리 천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볼 때, 최근 정부에 앞서 기업과 사교육을 중심으로 부활하고 있는 한자 급수시험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심정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박보영 '상큼 발랄'
  • 박보영 '상큼 발랄'
  • 고윤정 '매력적인 미모'
  • 베이비돈크라이 이현 '인형 미모'
  • 올데이 프로젝트 애니 '눈부신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