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삶에 참조할 만한 준거 노릇을 못할때
사회는 더 빠르게 유동의 운동성을 내부화
근대의 속성을 ‘액체성’의 은유 속에서 파악하고 설명한 사람은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근대는 그 시작부터 어떤 ‘액화’ 과정이 아니었던가?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 melting the solids’가 줄곧 근대의 가장 주요한 소일거리이자 으뜸가는 성취가 아니었던가? 달리 말하면 근대는 그 시작부터 내내 ‘유동적’인 것이 아니었던가?”(지그문트 바우만, ‘액체 근대’) 과거의 견고한 것들, 즉 한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로서의 제도·풍속·도덕 따위는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그것들이 오늘의 삶에 참조할 만한 단단한 준거틀 노릇을 하지 못할 때 사회는 더 빠르게 변전과 유동으로 꿈틀대는 운동성을 내부화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특성이 아니었던가? ‘주형틀’들은 빠르게 해체되고, 근대성의 녹이는 힘은 해체된 이것들을 용광로 속에서 녹여낸다. 유동적 근대는 빠르게 생활양식을 손에 쥐고, 사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시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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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의 속성을 과거의 견고한 것들이 녹아내리는 ‘액체 근대’로 규정한다. 20세기 초반의 경성(서울의 옛 이름) 역시 그간의 제도·풍속·도덕 따위가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새로운 서양 기술과 유행들이 밀려들어 지식인들조차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혼돈을 겪는다. 사진은 일제시대 경성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
새로운 식민 권력이 출현하고 경성(서울의 옛 이름)은 반관반민으로 구성된 ‘경성도시계획연구회’ 등의 주도 아래 대경성 프로젝트의 담론들이 발의되고 실행에 옮겨지면서 그 모습을 일신한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성의 시구 개정 계획을 수립하고 본지선(本支線) 도로, 하수구 등의 개축에 착수하여 오늘날 계속 시행하고 있으나, 이는 소위 대경성 건설의 이상에서 출발한 도시계획이 아니고 따라서 수년 후 완성을 볼 터인데 오직 성벽 내에 구시가(舊市街)의 면목만을 새롭게 할 뿐 극히 불철저한 계획이다. 경성은 조선의 수부(首部)요, 일본 민족의 대륙 발전을 위해선 유일의 기반이 되는 도시라 반드시 확장될 것이다. 적어도 백만 이상의 인구를 포용할 규모로 대경성 건설의 근본 계획을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경성도시계획연구회를 조직한 이유이다.”(조선연구회, ‘대경성’, 여기서는 김백영의 ‘지배와 공간’에서 재인용) 아울러 모시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는 구태에서 벗어나 ‘모던 뽀이’와 ‘모던 껄’들이 식민지 도시 경성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다. 이들은 근대 시민으로 사회 계급의 위계에서 “화신(花信)이나 삼월(三越·미쓰코시 백화점)에 몰려다니는 시민 제군들”과 겹쳐진다. 경성이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춘 이 무렵 경성 사람들에게 도시가 빚어내는 갖가지 요동과 갑작스러운 움직임들을 내재화한 근대의 생활양식, 그리고 근대 도시의 시공간에서의 경험들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도시감각의 내면화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지용이나 김광균, 김기림과 이효석 등의 문인들이 이 시기에 창작한 작품들을 보면 ‘이국정서’의 표출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바로 낯설고 신기한 근대 경험과 상관되는 것이다.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란스’에는 종려나무, 카페 프란스, 루바쉬카, 보헤미안 넥타이, 페이브먼트, 장명등, 울금향, 이국종 강아지, 패 (앵무새), 갱사(更絲 ― 인도원산의 수입 피륙), 대리석, 자작(子爵) 따위의 이국적 기표들이 주루룩 나온다. 이효석의 소설과 수필에서도 카페, 백화점, 호텔, 요트구락부, 버터, 커피 따위의 이국 취향을 드러내는 기표들이 즐비하다. 모더니스트 김기림에게서는 근대 도시 경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백화점은 “밤하늘을 채색하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의상을 걸치고 “수백의 눈을 거리로” 향하고 있는 마물(魔物)이다. 이 마물은 “무형의 촉수(觸手)”에 달린 빨판으로 영혼을 흡혈한다. 근대 도시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욕망을 낳는다. 이렇듯 ‘모던 생활’은 범람하는 소비 상품들과 욕망의 카니발이 벌어지는 근대 도시공간의 시청각적 자극들에 둘러싸인다. 이 자극들은 매혹과 혐오라는 양가감정을 낳는다. 특히 백화점은 근대를 표상하는 욕망과 기호의 진열장이다. 백화점을 일상적으로 향유하게 경성인들에게 “‘다이야’ 반지-양식-오후의 산보로-백화점-극장의 특등석-예금통장”(김기림, ‘결혼’) 따위에 대한 욕망은 특별할 것이 없는 보편의 욕망으로 자리 잡는다. 바로 이 근대의 유동하는 시간 속으로, 그리고 빛과 현란한 색채들이 산란(散亂)하는 경성의 중심 공간으로 이상과 ‘모던뽀이’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카페와 끽다점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막스 쟈콥, 장 꼭또, 만 레이의 그림과 음악과 시와 영화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이상은 미샤 엘만의 바이올린 연주에 열광하고, 르네 클레르의 영화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근대와 유행을 향유하며 전위에서 이끈 선구자들이고, 근대를 자욱하게 물들인 “유행의 반복동일성”에 대한 은밀한 공모자였고(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아울러 그에 대한 비판자들이었다. 그들 중의 일부는 ‘댄디’로 불릴 만했고, 유한계급의 게으름을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댄디는 의복의 단일성에 저항하며, 게으름뱅이는 동작의 단일성에 저항한다”(그램 질로크, 앞의 책)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상의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들은 확실히 당대 문학의 단세포적 단일성에 대한 저항이고, 그의 생활상에서의 한없는 게으름은 당대의 노동 분업과 생업의 분주함에 대한 영웅적 저항이다. 그들은 액체화되어 흐르는 근대를 먹어치우고, 근대의 징후들과 그 이미지들을 언어적 현존으로 뱉어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대개는 불운에 들린 삶이었다. 더러는 가난과 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생을 접거나, 더러는 납북과 자진 월북으로 자연 수명을 누리지 못하거나 잊힌 채 세월은 흘렀다. 세월은 과거를 송두리째 갈아엎는다. 근대 경성의 주체들! 그렇게 감춰지고 잊힌 그들이다. 그들은 ‘근대’에 대해 어떤 상상을 했는가. 액체 근대는 그들의 삶과 의식 속으로 스미고 섞여 그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우리는 20세기 전반을 망국과 피침, 식민지배, 전쟁으로 다 흘려보내는데, 그 와중에도 서구의 근대를 이식하면서 우리의 삶과 의식은 크게 변한다. 그 후반은 압축 근대와 압축 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30년대 경성은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의 전성시대이다. ‘외부의 사유’를 시작하며 미적 혁신을 표방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들, 거리로 쏟아져나온 유행과 소비의 첨병들이 ‘모던’의 시대를 이끈다. 모던은 당대의 다양한 전근대적 현상들 위로 덮쳐 그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쓰나미다. 모던의 세례를 받은 예술가들, 지식인들, 신여성들에게 모던은 양가적인 그 무엇이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은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상품들이 소비되는 주요 시장 중의 하나였다. 신여성들은 양장뿐만 아니라 시계, 금테 안경, 보석 박힌 금반지와 같은 액세서리로 멋을 내고, 버선을 벗어던지고 양말을 신었으며, 흑백 콤비구두가 대유행이었다. 첨단 모던에 열광한 사람들은 모던 이전의 것들을 과거의 것, 시대착오적 퇴영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열등한 것으로 여겼다.
이 근대는 한편으로 경박하고 퇴폐적이며 나쁜 사조를 몰아오는 부정적인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래서 ‘모던’은 새롭게 경험할 시대의 첨단문화로서의 선망과 동경이라는 뜻과 더불어, ‘모던뽀이’와 ‘모던껄’이라는 용어에 녹아들어간 경박한 문화에 쏟아지는 경멸과 조소의 뜻도 겹쳐진다. 모던은 유교의 유습들과 봉건제 군주주의 영향 아래서 굳어진 낡은 삶의 양식을 혁신하는 서구 근대를 모방한 삶의 양식과 유행이다. 이렇게 모던은 적대감과 동경이라는 양가적 감정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일상으로 번져나갔다. 김진송은 이렇게 적는다. “모던이 경박스럽고 불량스러운 현상에 붙이는 말이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진보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뾰족 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는 과감한 행동은 분명 전근대적인 인식을 전화시키는 잠재된 의지였다. 모던족들은 도시문화 속에서 새로운 직업군 또는 인간군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가장 먼저는 다방이나 바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들 새로운 인간군들은 삶의 패턴으로서 도시화와 현대화에 먼저 익숙해졌다.”(김진송, ‘서울에 댄스홀을 허(許)하라’) 본디 근대성이란 과거의 권위와 준거틀에서 벗어난 새로움과 현재성에 대한 예찬이다. 따라서 근대성은 덧없는 현재의 순간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런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근대성이 현재의 찬미와 관련이 있고, 종종 아직 규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새것’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유동하는 것이지만 ‘유행’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근대성은 흔히 전통과의 결별, 새로움의 감정, 현기증 나는 변화 같은 시간의 단절에 대한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된다. 보들레르가 근대성을 ‘순간적이고, 유동하며, 우연적인’ 것이라는 정의했을 때가 그 예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 운동에 대한 단순한 인지와 수용이 ‘근대적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들레르는 믿었다. 반대로 그 운동에 관해 일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거나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안에 내재하는 영원한 그 무엇을 포착하려는 의도적이고 힘겨운 노력이 ‘근대적임’을 표상한다. 근대성은 시간의 흐름을 문제 삼는 유행과는 다른, 현재의 ‘영웅적’인 측면을 포착하게 만드는 태도로 녹아 들어간다. 흘러가는 순간에 대한 감성이 아니라, 현재를 ‘영웅화’하려는 의지가 바로 근대성인 것이다.(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 이일수 옮김, 강, 2009
●김백영 ‘지배와 공간’, 문학과지성사, 2009.
●김진송 ‘서울에 댄스홀을 허(許)하라’, 현실문화연구, 1999.
●이성욱 ‘한국 근대문학과 도시문화’, 문화과학사, 2004
●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노명우 옮김, 효형출판, 2005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 이일수 옮김, 강, 2009
●김백영 ‘지배와 공간’, 문학과지성사, 2009.
●김진송 ‘서울에 댄스홀을 허(許)하라’, 현실문화연구, 1999.
●이성욱 ‘한국 근대문학과 도시문화’, 문화과학사, 2004
●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노명우 옮김, 효형출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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