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 문외한인 김씨, [투란도트]를 보기위해 다시 한번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을 찾았다. 연말에 본 국립오페라단의 [아듀 2010 송년 갈라]에서 칼라프 역의 테너 김재형이 부르는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로 인해 '귀가 행복한 묘한 느낌'을 다시 받고 싶어 극장행을 선택한 것이다.
이번에 볼 오페라는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이소영)이 중국국가대극원(NCPA) 과 함께 무대에 올리는 [투란도트](연출 천 신이)이다. 오페라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시놉시스에 대해서도 조금 공부하고 왔다. 이젠 귀를 활짝 열고 집중해보자고 다짐했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칼라프 역의 가수 목소리가 내가 원하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가 만족스럽지 않으니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지인에게 물어보니, 오늘의 캐스팅은 중극인 테너 '워렌 목'이라고 일러준다. 귀가 잘 안들리는 김씨 왈 "목이 원래 그렇다고?" "......"
1막 후 인터미션 시간에 로비에 나가 관객들이 하는 말에 귀기울여 본다. "비싼 오페라 보러 와서 자버렸어".란 말이 들려온다. '아! 나만 잠시 졸았던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가 나오는 3막이 시작됐다. 거짓말 하지 못하는 문외한씨, 박수를 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을 말하자면, "등이 가려워 상대방에게 긁어달라고 말했는데, 자꾸 그 주변부만 긁으면서 다 됐지? 시원하지?" 라고 말했을 때 느꼈던 답답했던 심정과 비슷하다. 객석에서도 큰 박수는 쏟아져나오지 않았다.

이 상태로 막 오페라에 불붙기 시작한 애정이 사그러드나? 하는 생각에 맥이 빠져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객석에 앉아있는 칼라프 역의 또 다른 테너 박지응(Ruddy Park)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같이 간 지인이 자꾸 옆구리를 찔러서 저 분이 [투란도트] 무대에 오르는 한국 가수 분이란 걸 알게 된 거다. 마음 같아선 "나 이 상태로 집에 못 가니 여기서 노래 한소절만 들려주면 안될까요?"하고 말하고 싶어졌다. 은근 낯가리는 김씨, 말 한마디도 못하고 인사도 못했다. 할 수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테너 박지응이 나오는 날 다시 한번 예술의 전당을 찾는 수밖에.
문외한 김씨,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 여러 번 오다보니 이젠 이 곳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무대에 테너 박지응이 등장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를 처음 본 순간 듬직한 체구와 얼굴로 인해 믿음직한 마당쇠 '돌쇠' 이미지가 떠올랐다. 힘 있는 걸음걸이뿐 아니라 공명하는 성량은 더운 여름 밤 마시는 맥주 한잔같이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넓은 오페라 극장을 시원히 적시는 그의 음색에 귀가 활짝 열리니 오페라 극장에서 결코 잠들지 못했다. 칼라프 역만 캐스팅이 바뀐 날이었지만, 투란도트(쑨 씨우웨이), 칼라프의 아버지인 티무르(티안 하오지앙)의 목소리도 새롭게 들릴 정도로 조화가 남달랐다. 인터미션 시간에 로비에서의 반응도 달랐다. "쩌렁 쩌렁하내""극장이 울려"등등

이젠 대망의 3막이다. 사선으로 열리는 무대 계단에서 등장한 박지응 칼라프가 목소리를 뽑아내자 다시 한번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음으로 올라가는 승리(vincerò)부분에 이르러선 '박지응의 승리'가 확실했다. ‘오페라 극장에서 아무도 잠들지 말라’ 라고 포효하듯 외치는 것처럼 들렸으니 말이다. 25일 공연과는 확연히 다른 박수 소리와 '브라보' 소리가 이어졌다. 문외한 김씨도 감격에 겨워 처음으로 '브라보'라고 외쳤다. '이러다 오페라 매니아 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까지 잠시 들었다.
이젠 전체적인 감상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구혼자가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는 얼음공주 투란도트와 공주의 모습에 반해 죽음을 무릅쓰고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왕자 칼라프, 그리고 칼라프를 사랑하는 노예 소녀 류의 가슴 아픈 희생 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알아둘 정보 한 가지, 투란도트는 선조인 로링 공주를 겁탈했던 타타르 왕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얼음공주가 된 것. 이번에 올려진 작품은 푸치니가 3막 초반 류의 죽음까지만 작곡한 미완성 곡을 중국 작곡가 하오웨이야가 새로 작곡해서 올렸다. 하오웨이야 버전의 [투란도트]인 셈이다.
우선, 이번 작품은 무대가 상당히 화려하다. 상하 무대를 두루두루 활용하며, 관객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다. 마치 블럭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 무대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황제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황금빛으로 눈을 자극하며, 투란도트의 의상과 머리에 늘어뜨려진 은빛 보석 역시 얼음공주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문외한씨가 본 투란도트 역 중국 가수는 칼라프가 수수께끼를 다 맞추자 마치 어린 소녀가 징징 대는 듯 어쩔 줄 몰라했다.
생애 처음 오페라 [투란도트]를 본 문외한씨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칼라프를 사랑하는 류의 아리아 나의 말을 들어주오! (Signore, ascolta!),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도(Tu che di gel cinta)이다. 목소리를 터트려 멀리 내보내는 소프라노는 처음 본지라 경이로운 눈망울로 류(박지현)를 바라봤다. 단순히 고음으로만 알고 있던 소프라노 가수의 음색에도 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류가 자결하자 갑자기 커다란 날개를 펄럭거리며 남자들이 등장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볼때는 살짝 '이게 뭐지?'하고 고민했다. 두번째 볼때는 중국천사이자 불사신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도대체 저 날개 로 류가 어떻게 숨어 하늘로 승천하나? 호기심에 지켜봤다. 천사의 호위를 받은 류가 움직이는 사선 계단에 안착하면, 티무르가 팔을 올려 1차로 가려주고 2차로 불사신 날개 뒤에 숨어 하늘로 올라가는 식이다.
칼라프 역할을 맡은 두 배우의 다른 캐릭터 해석은 지인과 계속 논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문외한씨의 말에 따르면, 3막 핑, 팡, 퐁이 여자, 보석등으로 유혹하는 장면에서, 워렌 목 칼라프는 야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유혹하자 (이미 여자들은 다 알고 있고 보석도 만져볼 만큼 만져봤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는다. 마치 부자 바람둥이에게 새로울 게 없는 여자와 보석을 보여준 형색이었다.
반면 박지응 칼라프는 유혹하는 여자들도 잠시 쳐다보고, 보석도 만져보면서 호기심을 내보인다. 마치 시골 소년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 눈이 휘둥그레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투란도트' 임을 확신하며 유혹을 거부한다.
바리톤 음성이 귀에 들어온 초록색 의상의 핑, 산다라 박 머리를 하고 나온 파란 색 의상의 팡, 빨간색 꼬깔 모자 양쪽에 장미꽃을 달고 나온 퐁은 등장부터 웃음을 몰고왔다. 핑, 팡, 퐁이 2막 고향을 생각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연꽃치마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은 상당히 이채로웠다. 단순히 치마에 연꽃 그림이 그려진 게 아니라 연꽃이 하나하나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로링 공주의 망령은 처음 볼 땐 중간 중간 졸면서 보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두번째 볼때 계단 아래에서 팔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까만 옷을 입은 여자가 유연하게 춤을 추는 걸 보고 복수의 유령인 것을 알아차렸다.
문외한씨, 같은 작품을 2번 보더니 이제, 안보이던 것들이 속속 눈에 들어온다. 조그마한 체구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피트석에서 방방 뛰기도 하고 마치 피아노를 치는 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지휘봉을 휘두르자 음악의 흐름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중국 국가교향악단 수석지휘자이자 부산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인 리신차오가 그 주인공이다.

문외한씨가 다음에 볼 오페라는 인씨엠오페라단 푸치니의 3대 걸작 오페라 [라보엠](2/10 ~ 2/13)이다. 다음 타자는 국립오페라단 구노의 [파우스트](3/16~3/20)로 정했다. 문외한씨의 다음 오페라 이야기도 기대해주길 바란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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