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가 부부의 꿈이었다 고흐와 모네 피카소의 역작들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게끔 하는…
꿈은 이루어졌고 지금 이곳은 자연속의 미술관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하얀 자전거 타고 광활한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고흐 그림 보러 가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남동쪽의 작은 시골마을인 오테를로 인근 국립공원 ‘더호어 벨뤼어’(De Hoge Veluwe)는 흰색 자전거 천지다. 어른도 아이도 국립공원 입구에서 빌려주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내달린다. 목적지는 고흐, 몬드리안, 피카소, 모네, 르누아르의 명작이 있는 크뢸러 뮐러 국립미술관. 특히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보다 눈에 익은 고흐 작품이 많은 곳이다. 제2의 고흐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놀랍게도, 여의도 면적 7배에 자전거 길만 40㎞에 이르는 공원은 한때 사유지였고, 그 한복판에 자리한 미술관의 작품은 한 여성의 ‘컬렉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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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은 독일 기업가 집안의 딸 헬렌 뮐러(1869∼1939)의 원대한 꿈에 고개 숙이게 된다. 정재영 기자 |
크뢸러 뮐러는 독일 기업가 집안의 딸 헬렌 뮐러(1869∼1939)의 미술품 수집 열정이 담긴 곳이다. 그가 생전에 모은 작품만 1만1500여점. 20세기 최대 개인 소장 컬렉션에는 그림 90여점과 드로잉 170여점 등의 고흐 작품도 포함된다. 헬렌은 고흐 집안을 빼곤 가장 많은 작품을 보유했을 정도로 고흐에 매료됐다.
그는 19살 때인 1888년, 네덜란드 기업인 안톤 크뢸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각각 13살, 20살일 때 처음 만났다. 헬렌의 아버지 회사에서 사업을 배우던 안톤은 어린 헬렌과 사랑을 키웠다. 미술관 이름은 이 두 사람의 성과 같다. 결혼 후 ‘헬렌 크뢸러 뮐러’로 불렸기에 그의 이름만 딴 것이라고 하지만, 개관 과정을 보면 남편 안톤의 흔적도 만만치 않다.
헬렌은 미술품을 열정적으로 수집했고, 사업에 성공한 안톤이 구입한 광활한 땅은 국립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광활한 대지를 지나 명작을 볼 수 있는 건 두 사람 덕이다.
헬렌이 미술에 눈을 뜬 건 남편 회사의 급성장이 계기였다. 헬렌의 아버지가 1889년 심장마비로 숨지자 안톤이 철광회사 운영을 맡았다. 이후 21세기 ‘닷컴신화’처럼 회사는 번창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로 손꼽혔다. 헬렌은 자신을 잘사는 집의 ‘안방마님’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해했다고 한다. 유명 자서전 등 책 읽기, 집안 꾸미기, 승마 등에 집중한 이유다.
그러다 1905년 딸의 미술 선생인 브레머(1871∼1956)를 만나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미술에 눈을 떴다. 고흐 작품을 많이 모은 것도, 몬드리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게 된 것도 브레머를 통해서다. 그렇게 키운 안목으로 현대미술 작가들을 지원하거나 비평도 했다.
헬렌의 첫 미술관은 1913년 남편 회사 건물의 1층을 개조해 만들었다. 그 무렵 ‘그레이트 뮤지엄’을 생각했다. 광활한 사유지에 ‘헬렌 컬렉션’을 담을 미술관을 짓고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원대한 꿈. 그게 크뢸러 뮐러의 시작이다.
◆말 타고 사냥하던 터에 미술관 들어서다
‘큰 꿈’엔 당시 내로라하던 건축가들이 손을 내밀었다. 작품 수집과 함께 여러 비평서를 낸 헬렌은 미술계에 이름을 이미 내민 터였다. 철강업계 큰손인 남편 안톤이 자산가인 점이 한몫했다는 평가다.
당시 사냥을 즐긴 안톤은 네덜란드 동부 호어 인근에 농장 몇 개와 60㎢에 이르는 삼림과 황야를 사들였다. 여의도(8.3㎢)나 서울시(605.33㎢) 면적과 비교하면 상당한 규모다. 안톤은 거기서 사냥을 했고 헬렌은 말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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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최대 국립공원 ‘더호어 벨뤼어’ 입구 3곳에서 무료 제공되는 흰색 자전거를 타고 크뢸러 뮐러 미술관으로 향하다 보면 숲과 호수, 사막과 초원, 광야를 모두 즐길 수 있다. 정재영 기자 |
1920년대 세계공황 탓에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꿈이 깨지는 듯했다. 2년 뒤에는 미술품 수집도 그만둬야 했다. 삶의 기쁨이 사라져서일까. 1924년 헬렌은 신경증 진단을 받았다.
헬렌 부부는 결국 중대한 결심을 한다. 빚에 떠밀려 미술품이 팔려가는 걸 볼 수 없었다. 그 넓은 땅과 컬렉션을 정부에 기증하기로 한 것. 그러나 미술관의 꿈을 버릴 순 없었다. 부부는 35년 정부에 컬렉션을 기증하면서 미술관을 짓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렇게 해서 ‘과도기적(transitional)’ 미술관 건축이 정부 주도로 시작됐다.
1938년 7월13일 정식 개관하자 미술관은 자연과 교감하는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밤의 카페 테라스’, ‘우체부 조셉 롤랭’, ‘아를의 다리’ 등 고흐 작품이 전시된 곳에 관람객이 북적이는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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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뢸러 뮐러 미술관 야외 조각공원의 애나멜 정원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
헬렌은 초대 관장을 맡아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미술관 개장 1년 만에 헬렌은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안톤은 그로부터 2년 뒤 헬렌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애초 그레이트 뮤지엄이 들어설 계획이었던 ‘프랑스 언덕(프렌치 힐)’에 함께 묻혔다.
헬렌의 원대한 계획도 사실상 무산됐다. ‘과도기적’ 미술관은 ‘국립 미술관 크뢸러 뮐러’로 개명됐다.
이후 건물 양편에 전시실과 입구가 새로 생겼고, 야외 조각정원과 새 건물이 들어서는 등 수십년간 미술관 내·외부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헬렌의 꿈은 해를 거듭하면서 곳곳에 스며들었다.
전시관 곳곳에 햇살이 지나간다. 야외 조각품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작품을 감상하며 산책하다 보면 서너 시간이 금세 흐른다. 미술관 입구에선 동상 ‘미스터 자크’와 철제 작품 ‘케이 피스’가 관람객을 맞는다. 7만평이 넘는 야외 조각정원엔 로뎅, 헨리 무어 등 현대 거장의 작품이 숲 여기저기에 숨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미술관 주변 잔디와 산책로 인근 테이블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쉬는 가족이나 연인도 쉽게 눈에 띈다. 관람객은 자연과 동화된 작품을 마음껏 즐긴 뒤 미소를 머금은 채 하얀 자전거에 다시 몸을 싣고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드넓은 공원을 내달리다 숲과 사막, 초원과 호수가 어우러진 자연에 취하고, 붉은 사슴과 노루 등 야생 동물과 조우한다. 자연이 품은 미술관이 주는 감동이다.
오테를로(네덜란드)=글·사진 정재영 기자
협찬=대한항공·여행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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