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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벨트의 ‘적청 팔걸이 의자’(1918년)와 몬드리안의 컴포지션 연작. |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의자만큼 만드는 사람과 앉는 사람의 정체성에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순수함을 극적으로 몰아가 몬드리안 추상화의 한 부분을 오려놓은 것같이 의자의 기본 뼈대만 남긴 리트벨트의 ‘적청 팔걸이 의자’도 장식장이나 침대로 만들어졌다면 의자만큼 큰 가시적 효과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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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방문을 위한 의자’(브루노 무나리 1945년. 앉는 자리가 알루미늄으로 처리되어 잘 미끄러지게 제작되었다. 제작회사: 자노타. 상품명:‘싱어’). |
‘앉기’는 우리가 의자에 부여하고 있는 수많은 기능 중 한 부분이다. 의자는 역사적으로는 권력의 상징이었고, 현재까지도 신분이나 자격을 구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의자의 모양과 형태에 수많은 사회적 의미를 씌워주며 심지어 의자가 놓여진 방향이 갖는 뜻을 파악하려고 무던히 노력하곤 한다.
우리는 의자에 자아를 투영하고 감정을 이입시키며 의자를 통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의자를 내주고, 서로의 의견을 듣기 위해 탁자를 끼고 마주 앉는다. 상투적이면서도 극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의자를 집어던지면 분노나 좌절감이 제대로 전달되고, 의자를 넘어뜨리는 건 불쾌한 대상에게 그가 환영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방법이다.
1930년대가 배경인 영화 ‘이지 버츄’(Easy Virtue, 2008)에서 자유분방한 성향의 미국여성 라리타로 분한 제시카 비엘을 비꼬고 모멸감을 주기 위해 전통 있는 영국 가문의 시어머니 베로니카가 선택한 것도 바로 의자였다. “네가 앉은 의자보다도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 왔으니….” 여기서 의자는 실용적인 것 이상의 상징적인 물건이 된다. 베로니카는 집안의 오랜 전통과 본인을 동일시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집안의 전통과 역사가 서린 땅을 서슴없이 팔아버리라고 부추기는 며느리를 혐오하고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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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1001개의 의자’(아이 웨이웨이. 2007년 제12회 카셀 도쿠멘타 전. 사진:얼스 마일리 갤러리). |
유명 인물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에는 가상의 집무실이나 서재가 꾸며지고 그들이 사용했거나, 혹은 했을 법한 안락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방문자가 그 의자에 앉아 의자 주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한 기념관 측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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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의자와 그의 파이프’(반 고흐,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고갱의 안락의자’(반 고흐,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 |
의자는 예술가들에게도 상당히 매력적인 존재였다. 고흐는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듯한 방향으로 놓여진 자신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를 그렸다. 동료 작가인 고갱에게서 느낀 우정과 같은 화가로서의 불가피한 경쟁의식, 고갱이 떠난 후 느낀 상실감과 그에 대한 집착 등 작가 내면의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너무도 잘 표현된 그의 그림에서는 작품의 주제가 빈 의자가 아닌 다른 물건으로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의자가 주는 전달력이 강렬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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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 특징이 돋보이는 의자. ‘트론 암체어’(드로르 벤셰트리트 2010년. 영화 ‘트론:새로운 시작’을 위해 이탈리아 카펠리니사가 월트 디즈니 시그너처와 협업으로 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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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자’(요셉 보이스, 1964∼85년). |
오늘날 예술에서 디자인의 흡입력은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게 커졌지만 상업적 대중문화로 치우칠 위험도 함께 자라났다. ‘짧은 방문을 위한 의자’로 의자를 오브제로 만들었던 브루노 무나리는 사실 디자인의 기능과 실용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해 디자인과 예술의 혼란을 견제했던 디자이너였다.
그는 가구회사 자노타에서 의자 디자인을 의뢰해 왔을 때 이미 세상에는 ‘쓸 만한’ 의자가 다양하게 참 많은데 또 다른 의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에게 예술은 ‘놀이’에 가까웠는데, 펴서 세웠을 때는 비율이나 형태 등 조각의 미적 규칙을 가졌지만 봉투에 넣어 카드처럼 보낼 수 있었던 종이로 된 ‘여행용 조각’이나 ‘읽을 수 없는 책’ ‘쓸모없는 기계’ 시리즈처럼 언어유희를 즐기는 작품을 즐겨 제작하곤 했다. 최초의 ‘짧은 방문을 위한 의자’는 9개의 한정판으로 작가의 사인과 함께 디자인의 이미지를 벗고 조각처럼 좌대에 올려졌지만 차후에는 좌대가 없는 일반 의자와 같은 형태로 대량 제작되어 ‘싱어’라는 상품명으로 현재까지 판매되고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거주 조각·미술설치가 hojin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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