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인구이야기 1

관련이슈 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입력 : 2010-11-24 18:05:56 수정 : 2010-11-24 18:05:56

인쇄 메일 url 공유 - +

1㎢ 당 337명… 방글라·중국에 이어 인구밀도 세계3위 차지
과거 한반도의 3∼4배 유지… 18세기 에도는 세계최대도시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서 십수만명 동원
서기 1600년 10월21일. 일본 기후(岐阜)현 세키가하라(關ヶ原) 벌판에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東軍)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선봉에 선 서군(西軍)이 열도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룬 것이다. 당시 전국의 모든 봉건 영주들이 두 패로 갈려 전투를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10만, 서군은 8만명이 참전해 교전 병력만 18만명에 달했다. 단 하루 동안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거지인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며 에도 막부의 반석을 세우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그림. 당시 천하를 놓고 다퉜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측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한 판 승부는 이후, 소설과 연극, 만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가장 인기 있는 역사 소재로 사용됐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드는 궁금증 하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두 차례에 걸쳐 7년간 동북아시아에서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세계 전쟁을 벌였던 일본이 어떻게 해서 종전 2년 만에 다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를 스스로 벌일 수 있었을까? 두 차례에 걸친 왜란에서 수많은 장정과 백성들을 잃으며 인구가 급감했던 조선은 약 40년 후에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도 정규군의 수가 3만5000명을 넘지 못했는데···.

이유는 바로 한국과 차원이 다른 일본의 인구 규모에 있다. 2010년 현재 1억2700만명으로 세계 10위의 인구 대국이며 한국(남한) 면적에 해당하는 10만㎢ 이상의 국가만을 놓고 보았을 때 방글라데시,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인구밀도를 가진 국가가 일본인 까닭에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인구밀도는 1㎢당 337명으로, 인구 10억명인 인도의 인구밀도(328명)보다도 높다. 참고로 인도는 대륙에 필적하는 땅덩어리를 지닌 아대륙(亞大陸)으로 면적만 일본의 9배에 이르는 대국. 결국 일본인들이 인도만 한 땅덩어리에서 산다고 가정하면 인도 인구를 훌쩍 넘길 정도로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선사시대 이래 동북아시아에서 열도의 인구는 언제나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점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처럼 인구조사가 정밀하게 시행되지 않은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기록인지라 정확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필자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일본의 인구는 언제나 한반도의 3~4배를 유지했다. 이에 따라 기원 전인 조몬(繩文)시대에 이미 10만명에서 26만명 정도가 열도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기원전에서 기원후인 서기로 넘어오는 야요이(彌生) 시대에는 벌써 약 60만명이 열도에 터를 잡은 것으로 어림된다.

이러한 일본의 인구는, 특히 통일신라에 해당하는 나라(奈良) 시대에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부산 인구를 훨씬 웃도는 약 450만명에 다다른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의 인구가 약 200만명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시기의 헤이안(平安) 시대에는 일본 인구가 약 550만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양국 간 인구 격차는 더욱 벌어져 임진왜란 당시인 1500년대 말에는 조선의 인구가 400만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일본의 인구는 120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덧붙이자면, 한반도 거주 인구가 1000만명을 넘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여년 전인 1900년대 초의 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도발 이후 다시 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르며 십수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일본의 저력에는 또, 압도적인 인구력 우위와 더불어 사무라이 문화가 한몫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일례로 한국의 지배 계층은 대부분이 문관이었던 데 반해, 일본 전체 인구의 6% 정도를 차지했던 사무라이는 실상 대부분이 무관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임진왜란 당시의 1200만 일본인 가운데 80만 정도가 사무라이들이었으며, 이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40만명 정도가 전투 가능한 청장년층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가 않다. 그렇게 편성된 군인들 가운데 15만명 정도는 조선으로 침략 원정을 떠나고 나머지 25만명 정도는 본토에 대기했다니, 임진왜란으로부터 2년 후에 20만명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게 하등 이상할 리 없다. 참고로 일본군이 한반도로 들어올 당시, 조선 정규군의 규모는 6만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반도에 처음 선보인 조총은 다섯 명에 한 명꼴로 보급됐다. 참고로 3만정에 이르는 왜군의 화승총 규모는 당시, 유럽 전역의 화승총보다도 그 수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18세기에 일본을 방문한 많은 서양인들은 지금의 동경에 해당하는 에도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았다. 사실, 에도는 이미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화폐를 매개로 한 시장경제와 상업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와키모토 유이치가 지은 ‘거상들의 시대’에서는 런던이 86만, 파리 54만, 베이징 50만, 그리고 조선의 한양이 30만명에 그친 1700년대 당시, 에도에서 태동한 화려한 자본주의와 불세출의 자본가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2세기 이상 전쟁이 사라진 채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1868년의 메이지 유신에 이르면 인구가 3000만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후 30여년 뒤인 1900년대 초, 한반도의 인구가 1000만명을 처음으로 돌파할 때 열도의 인구는 4000만명을 넘어서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 이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의 건의가 실현되기 힘들었던 현실도 일견 수긍이 간다. 당시, 400만명의 인구에 10만명의 정규군을 양성하라는 건의는 4000만 인구에 100만명의 국군을 유지하라고 권유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한국의 인구가 500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같은 비율로 계산해 볼 때 유지해야 하는 국군의 규모가 무려 125만명으로 배증하게 된다. 사실, 말이 좋아 125만명이지 지금도 세계 10위의 국방비를 지출하는 한국의 국군(2010년 현재) 규모가 60만명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늘 영원한 후진국으로만 여겼던 일본에 36년간이나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구한말의 역사적 배경에도 그 같은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술과 과학, 학문과 문명 등 모든 것에서 앞서 나간 일본이 인구에서마저 4배 이상 격차를 벌여나갔으니 자주적인 독립은 불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한반도를 기준으로 볼 때, 한국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북한의 인구가 다시 절반으로 줄어든 1200만명 정도라고 가정해 보라.

그렇다면 여기에서 드는 또 다른 궁금증 하나. 땅덩어리가 우리의 배라고는 하지만, 남한만 한 크기에 거주 인구는 200만명에 불과한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국토 면적에서 한반도와 별 차이가 없는 일본에 왜 그리 사람들이 몰려 사는 것일까? 그럼, 다음에는 일본에서 과거부터 왜 그리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일본과 한국의 인구 수 비교
년도(서기) 일본 한국
700 450 ?
900 550 200
1600 1220 400
1868 3330 750
1900 4000 1000
2차 세계대전 당시 8390 2553
단위:만 명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다미 '완벽한 비율'
  • 김다미 '완벽한 비율'
  • 조보아 '반가운 손인사'
  • 트리플에스 김유연 '심쿵'
  • 트리플에스 윤서연 '청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