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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기 이야기] <3>'북방을 지키는 신' 현무 유도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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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10-19 17:50:38 수정 : 2010-10-19 17: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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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참사 겪은 전두환 "다시 개발하라"
‘K2 계획’ 기본으로 개발 시동…2년만인 1985년 비행시험 성공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집권한 5공 정권은 시간이 걸리는 국내 연구개발에 의한 전력 증강을 포기했다. 외국에서 첨단무기를 들여오거나, 핵심기술 이전이 수반되지 않는 기술도입 생산을 통해 북한에 맞서는 쪽으로 국방전략을 수정했다. 이로써 1978년 ‘백곰’ 유도탄 발사 성공으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지대지 유도탄 체계 개발은 중단됐고 백곰의 후속사업이었던 K2, K3 및 K5 유도탄 개발계획도 백지화됐다.

전력 증강을 위한 율곡사업 예산이 외국산 무기 수입과 기술도입 생산 위주로 집행됨에 따라 국내 연구개발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 시절 국산 무기 개발을 주도했던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연구개발 예산도 1970년대 국방예산 대비 4%에서 1.3%로 줄었다. 당시 두 차례에 걸친 ‘숙청’으로 약 1000명에 달하는 ADD 인력이 쫓겨나고 조직 또한 대폭 축소됐다. 백곰 유도탄 개발 공로로 각종 서훈과 포상을 받았던 연구원들도 내팽겨쳐졌다. 수난의 시절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5년 11월 안흥시험장에서 현무 유도탄 시험비행을 참관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현무 유도탄.
ADD 제공
1983년 10월9일 당시 버마(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상황은 급반전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부총리를 비롯해 정부 고관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였다. 급거 귀국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손으로 용도 폐기시킨 유도탄 개발 프로젝트를 다시 끄집어내기에 이르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한미안보협의회(SCM) 산하 기술협력위원회(TCC)의 공동위원장이던 구상회(75) 박사는 “생각할수록 참으로 묘했다. ADD에 입소해 로켓 개발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돼 박 대통령으로부터 지대지 유도탄 개발 지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전 대통령에게서 유도탄 개발 지시를 다시 받게 됐으니…. 그러나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이제는 성공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이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 이상 큰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새로운 유도탄은 중단됐던 K2 유도탄 개발계획을 기본으로 각 구성체계 개발을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유도탄 사업 명칭은 공모를 통해 ‘북방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 담긴 ‘현무’(玄武)로 지어졌다.

1983년 11월29일 현무사업에 대한 국방부 승인이 떨어졌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업이 아니라 긴급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사업집행 절차를 생략하고 선행개발, 실용개발 및 생산 관련 예산이 일괄 승인되다보니 진행에 어려움이 컸다. 시간 제약과 연구인력 부족으로 연구원들과 방산업체 요원들은 불철주야 사업에 매달려야 했다.

드디어 1985년 9월21일 전 대통령과 국방장관, 각군 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현무 비행시험이 실시됐다. 시험절차는 백곰 유도탄 개발 당시와 동일했다. 비행시험은 대성공이었다. 백곰을 ‘미국산 나이키 미사일에 껍데기만 씌운 가짜’라고 깎아내렸던 전 대통령도 이날 비행시험을 지켜본 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현무 비행시험 성공은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할 경우 곧바로 평양을 보복 공격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병진 기자, 공동기획 국방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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