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일리스트, 물론 예민한 직업이죠. 그렇지만 함께 작업하는 이들 모두 힘든데 똑같이 힘들어 할 순 없잖아요? 스타일리스트는 단순히 의상을 잘 입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때론 다운된 현장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도 스타일리스트의 몫이라 생각해요."
스타일리스트 장은혜와 수화기 너머로 먼저 만났을 때 이미 짐작했다. 호탕한 웃음이 끊기질 않았던 그의 목소리에 웬지 기분 좋은 인터뷰가 될 것 같다는 예감. 제법 싸늘함마저 전해지는 가을 한낮, 압구정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장은혜는 유쾌한 바이러스를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다. 일할 때는 꼬박 며칠 밤을 지새는 철인이지만 쉴 때만큼은 열정적으로 놀아줘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녀의 말에서 베테랑다운 여유도 묻어났다.

◇ 18년차 스타일리스트, 오직 패션만 보고 달려왔다
장은혜는 현재 채연, 미쓰에이(miss A), 김건모, 박미경, 구준엽, 이정 등 주로 가수들의 스타일링을 책임지고 있다. 처음부터 가수들과 호흡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모델 주정은과 탤런트 이아현과의 작업이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맨 처음 부여받은 일이었다.
"벌써 18년 전이네요. 한창 '서태지와 아이들'이 인기를 끌면서 코디 네이터에 대한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 전 고등학생이었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죠. 대학 졸업 후 관련 학원을 다니면서 꿈을 구체화시킨 거고요. 당시엔 스타일리스트 학원도 몇 개 없었는데 학원을 나온 뒤 바로 주정은, 이아현의 스타일링 작업을 하게 됐어요. 특히 드라마 '딸부잣집'이 큰 인기를 누릴 때라 슈퍼루키였던 이아현과의 작업은 행운이었죠."
그녀는 연기자와는 다른 매력을 가수들과의 의상작업에서 발견하면서 가수들의 스타일링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모델, 연기자로 스타일링을 시작했을 때부터 가수들과 작업해 보고픈 갈증이 있었어요. 주로 의상을 협찬받아서 스타일링하는 연기자들과는 달리 가수와의 작업은 곡의 컨셉에 맞게 무대의상을 손수 제작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거든요. 가수들의 의상은 머릿 속으로 그렸던 그림이 브랜드 의상에 없는 경우가 많아 거의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원단을 떼다 새로운 의상을 창조해 무대에 올리는 일이 만족도가 크더라고요. 물론 노력은 배가되지만 제가 하고픈 일이기에 힘든 줄도 몰랐어요."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그녀에게 즐거움만 가져다주었던 것은 아니다. 부족한 잠과 인간관계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25살부터 탈모가 시작됐을 만큼 정신적, 육체적 노동 강도가 셌다. 하지만 '스타일리스트'란 직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의상을 무대 위에 올렸을 때 느껴지는 희열 때문이다.
"제가 만든 의상이 TV에 나왔을 때 뿌듯해요. 특히 아이비가 1집 '아하' '오늘밤 일'이란 곡으로 그해 신인상, 베스트 드레스로 뽑혔을 때는 정말 보람을 느꼈어요. 마침 채연도 댄스부문상을 받아서 기쁨은 더 컸죠. 수상한 가수들이 '은혜 언니 고맙습니다'라고 수상소감을 말해줄 때 사실 가장 행복하더라고요.(웃음)"
◇유재석·김건모, 요즘 패션센스 한 단계 '업'
스타일 전문가도 인정한 패셔니스타는 누구일지 궁금했다. 장은혜는 주저 없이 김민희를 꼽았다. "김민희는 워낙 체형이 받쳐주다보니 옷을 잘 소화해내는 것 같아요. 타고난 패션 감각도 무시할 수 없고요. 패션 영역에서 착실히 자기관리를 해온 것도 패셔니스타 명성을 얻는 데 한몫 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비약적으로 패션감각을 끌어올린 스타는 누굴까. "유재석, 김건모 오빠가 예전에 비해 패션감각이 많이 좋아졌어요. 유재석 오빠는 예전에는 부츠컷의 바지 스타일만 고수하셨는데 지금은 일자 세미, 스키니진까지 소화해요. 오빠 나름의 자신감이 생긴거죠."
패션은 주관적인 판단영역이다. 일부 네티즌으로부터 '패션 테러리스트' 혹은 '워스트 드레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을 때 황당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예전엔 그저 어이가 없었죠. 채연의 옷이었던걸로 기억해요. 미국 신문지 패턴이 들어간 '디올' 느낌의 의상이었는데 "채연, 스타일리스트랑 친해져야겠어'라는 댓글이 달렸더라구요. 어찌나 웃었던지. 전엔 마냥 신경 쓰이고 해당 연예인에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일일이 그런 댓글에 속상해하면 절대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재미있는 게 비난 댓글 가운데 '나는 이 옷 괜찮은데…'라는 댓글을 발견하면 얼마나 기쁘다고요.(웃음)"
가장 인상적이었던 스타일링 작업도 궁금했다. "클론의 '내사랑송이'란 곡의 의상 작업을 할 때였어요. 강원래 오빠가 휠체어 댄스를 선보였던 곡인데 어떻게 당사자의 맘을 헤아려 옷을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이 됐어요. 강원래와의 조화를 위해 구준엽에게 더 멋진 옷을 입힐 수 있었지만 포기했던 부분도 있고요. 강원래 오빠의 마음을 알아서 해줬어야 했는데 부족했던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아요."

◇ '방송사고' 에 울고 '2 MC 스타일링'에 웃고
십수년 동안 스타일리스트로 일해오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번은 촬영 연결의상을 전해주러 기흥휴게소로 가야하는데 전날 저도 모르게 잠이 깊게 들었던 거예요. 저 때문에 촬영이 3시간이나 지연돼 그날 감독님께 무릎꿇고 사죄했어요(웃음)"
반면 마냥 웃음이 터지는 에피소드도 있다. "배우 허이재 소속사에서 예능에서 보여준 채연의 의상이 맘에 든다며 허이재의 스타일링을 의뢰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은지원의 스타일링을 맡고 있었어요. 은지원과 허이재는 함께 SBS '인기가요'로 MC를 보고 있었지만 허이재측에서 제가 은지원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사실을 모르고 제안한 거였죠. 공교롭게도 두 MC의 스타일링을 맡게 된 상황이 어찌나 웃기던지. 허이재 소속사에서는 컨셉과 컬러를 맞출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환영하더라고요. 허이재를 마돈나로 꾸몄다면 은지원을 존 트라블타 컨셉으로 가져가는 등 두 사람을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작업이 무척 재밌었어요. 제작진들도 다음주엔 두 사람이 어떤 컨셉으로 나올까 궁금해 했고요."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듣는 과정에 고가의 협찬의상 및 액세서리 때문에 가슴 철렁했던 경험은 없는지 물었다. "아이비 '아하' 뮤직비디오'에서 사용한 목걸이가 2천만원이었어요. 웬만하면 춤 추거나 뛰는 액션이 들어가는 뮤직비디오에서는 고가의 액세서리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 뮤직비디오에서는 그 목걸이로 포인트를 주고 싶어서 사용했죠. 그때 기분이요? 어찌나 떨리고 불안하던지."
◇ 패션리더? 자신감이 만든다
"'난 왜 이렇게 옷을 못 입지?' '왜 촌스러울까'란 생각은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게 되는 거예요. 패션센스는 옷을 많이 입어봐야 키울 수 있어요. 결코 비싼 옷을 사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옷이 많은 곳에 가서 다른 사람이 5번 입을 때 20번은 입어봐야 본인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알 수 있고, 컬러감을 익힐 수 있어요. 노력하지 않고 패션센스를 논하지 마세요."
패션센스를 키울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달라는 질문에 장은혜는 '지름길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굳이 유행을 쫓지 않더라도 예전에 입었던 옷을 매치하면 유행에 뒤쳐지지 않을 수 있어요. 저 역시 어울리는 옷만 입거나 단점을 커버하기 급급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자신감만 있으면 뭐든 될 수 있어요. 패션도 공부와 똑같거든요."
그리고 솔깃한 몇가지 패션 팁을 알려줬다. "다리가 유난히 짧다면 너무 밑위가 짧은 바지를 피하는 게 좋아요. 하이웨스트지만 배바지보다 미들바지가 다리를 더 길어보이게 하고요. 뱃살을 눌러주는 바지나 롤팬츠, 발목을 덮는 타이트한 롱스커트도 키를 커보이게 하죠. 신발은 롱부츠나 부티부츠를 추천해요. 뱃살 커버에는 헐러하게 입기보다 오히려 타이트하게 입는 것이 효과적이랍니다."
내친김에 F/W(가을/겨울)시즌 패션 트렌드까지 물었다. "올 가을엔 니트와 카멜색이 유행할 것 같아요. 작년 겨울엔 파워숄더, 블랙 라인이 유행했지만 올해 겨울엔 여성스러운 스타일이 대세일 것 같아요. 블랙보다는 브라운, 카멜색상의 코트 하나 장만해 두시면 얇은 니트와 매치해 입기 좋으실 거예요"
인터뷰 내내 활기차게 패션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 스타일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남겨달라는 요청에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당부했다.
"스타일리스트가 화려한 직업인 줄 알고 무작정 뛰어든 후배들이 많아요. 그런데 막상 직업 전선에 뛰어들면 무거운 짐 들고 다녀야 하고, 잠도 못자는 등 힘든 일이 많다보니 포기하는 경우도 다반사예요.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다면 쉽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이뤄나갔으면 좋겠어요."
시종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인터뷰였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는 한껏 즐겁게 수다를 떨다 만 듯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었던 것이다. 막힘 없이 이어간 대화에는 일관되게 패션에 대한 열정이 흐르고 있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패션인생, 스타일리스트 장은혜는 머지 않은 미래의 청사진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섹스앤더시티'의 스타일리스트가 연세 지긋한 할머니라는 사실 아세요? 그런데도 여전히 시대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 패션감각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놀라워요. 저도 감각이 살아있는 한 이 일을 계속 할 거예요. 그리고 언제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스타일리스트 장은혜만의 브랜드도 꼭 갖고 싶어요. 가치 있는 도전이 될 것 같아요."
/ 정은나리 기자 jenr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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