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옥희의 영화’는 이런 의문과 외침에 답을 주지 않는다. 삶의 비선형성에 대한 확신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여백으로 보여줄 뿐이다. ‘옥희의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일관해 온 홍상수식 삶의 관조가 한층 뚜렷하게 소묘돼 있다. 세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범속함을 긍정하는 아량이 더 깊어졌을 뿐, 홍상수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를 근본적으로 지향한다.
‘옥희의 영화’에서 네 편의 에피소드는 각각 독립적이면서 상호보완적이다. 네 편이 비균질적으로 따로 위치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질성과 차이성이 순환고리를 이루며 분절과 연속을 반복한다. 등장인물들은 동일인물인데도 에피소드마다 전혀 다른 인물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동일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상이하다. 그렇다고 이들을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확증할 수도 없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이 영화에서 동질성과 차이성은 결국 우연적이거나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한 인물이 다른 인물로 확장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두 인물은 또 다른 인물로 수렴되기도 한다. 진구의 미래가 송교수 같기도 하고, 송교수의 과거는 진구와 닮아 있다. 진구와 송교수는 옥희(정유미)를 통해 한 데 모아져 종합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시차를 두고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두 남자와의 사랑을 한데 모아 퍼즐을 맞추듯이 붙여본다.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란 게 뭔지 끝내 알 수는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 옥희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를 대하는 감독 자신의 태도이자 언술이다.
‘옥희의 영화’는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제작 과정에서도 홍상수의 방식을 가장 극명하게 실험하고 있다. 시인이 오로지 직관에 의존하여 시를 쓰듯이, 홍상수는 영화적 직관 하나만으로 ‘옥희의 영화’를 만들었다. 4명의 스태프, 13회차 촬영이라는 극도로 간소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시대에 걸맞은 영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자본과 시스템이 장악해 버린 제작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색채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길 수 있는 힘. 이것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오로지 홍상수의 힘이다.
일상이 어떤 필연적인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홍상수의 영화가 황당하거나 느닷없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를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삶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삶의 불가해한 것들을 애써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상황들을 우리들에게 툭 던지며 그저 우리들이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상의 관성에 일침을 가할 뿐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촘촘히 뜯어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상황과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리고 극히 통속적이지만, 그 언어와 상황들이 모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낸다. 그러나 그 새로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는 것은 사실 홍상수가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들이다. 교묘하게도 홍상수는 영화의 의미를 완성하는 몫을 우리들에게로 돌려놓는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존재 이유를 확장하는 홍상수만의 방식이자 매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정점에 서 있다. 그의 다음 행로가 벌써 기다려진다.
교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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