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식량이 부족하던 60년대 초 당시 찰옥수수 장수, 찹쌀떡 장수가 새벽 거리를 누빈다. 아이들은 미군으로부터 우유 가루를 받아서 밥먹는 것을 떼우던 시절이다. 찹쌀떡 장수, 이들은 두부 장수와 더불어 인기를 상당기간 누리다가 1980년대에 사라진 직업이 된다.
4.19를 거치고 5.16이후 가발수출의 붐이 나타난다.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다. 가발 기술자라는 직업인이 인기를 얻는다. 대학생이 늘면서 대학교수를 하려고 유학을 가는 이들이 늘기 시작한다. 마을을 걸어서 찾아다니면서 긴머리의 청소년들에게 돈을 주고 머리를 잘라서 가발 공장에 제공하는 머리 수집 상인이 인기를 은근히 보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있었다. 연탄 배달부는 인기 직업. 그 당시에는 가스나 정유가 적던 시절이어서 이런 연탄 배달부들은 미리 주문을 받아서 연탄을 나르고, 연탄을 높은 고지대에 사는 이들에게는 값을 더 매겨서 배달해주는 일을 이들이 한다. 가스, 정유가 많아 지면서 보일러 기사들이 등장하자 이들 연탄 배달부는 사라지는 직업군으로 들어 간다.
3공화국에 의한 수출지향 정책은 섬유 산업엔지니어의 유망성을 높이게 된다. 이런 흐름을 타고서 직물 엔지니어가 인기 직업인이 된다. 1968년 전차가 서울에서 사라지면서 전차 운전수는 사라진다. 대신 시발 택시가 일반화 되면서 제복을 입은 택시운전수는 유망직업인으로 성장한다. "오라이"를 외치던 안내양은 버스가 늘면서 서서히 숫자가 늘어나서 당시에는 9금 공무원보다 높은 수입을 얻는 직업인이 된다. 자동차의 연구는 자동차 엔지니어의 직업적인 유망성을 높인다.
1961년 버스 여차장제를 실시한 제도 덕분에 여차장은 늘어나서 1960년대 중반기에는 이미 일만 5천 여명의 버스 안내양이 전국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다방들이 생기면서 다방레지들은 일하는 다방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단골 고객들과 담소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정취를 돋궈 주는 이들이 바로 도시 음악 다방의 DJ 라는 직업이었다. 이 직업은 대학가 다방에서 인기를 얻고, 그들의 음반 선택 능력과 음반에 대한 해설은 비오는 더욱 가치를 향상 시켜주는 선망 직업이었다.
거리마다 엿장수들이 가위를 흔들면 아이들이 모여서 엿장수 흉내를 낸다. 어린이들의 눈에는 당시에 엿을 마음대로 먹을 것 같은 엿장수가 부럽게 체감되기도 한다. 당시에 잊지 못할 직업으로는 서커스 단원이라는 직업이다. 서커스가 마을마다 열리면서 이들은 마을을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걸어가면서 분위기를 돋고 마을사람들은 없는 돈을 내서 서커스 구경을 한다.
방적공, 미싱공들은 수시로 밤세워 일하고 직업 근로조건은 열악해 지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1970년대
3공화국의 경제 부흥정책은 성공을 하면서 대중의 가슴에 희망과 낙관을 심는 대중 가요, 트롯가수가 인기를 얻는다. 남진 나훈아가 대표적인 가수다. 이들은 가슴아프게(남진) 사랑은 눈물의 씨앗(나훈아) 등의 트롯을 부르면서 사랑과 고향에 대한 애잔한 감성을 대중에게 전파하면서 리사이틀 공연을 펼친다. 리사이틀 공연 기획가는 당시에 청년들의 선망의 직업으로 등장한다. 맹호부대, 청룔 부대를 시발로 해서 한국 군의 월남전에 참전한 후 돌아온 이들이 가져온 새로운 물자들과 우리의 베트남 건설시장 참여는 서서히 달러벌이에 성공가도를 가게 한다.
중동에서 벌어 들이는 돈에 재미난 한국인들은 중동 건설수주를 강화 한다. 당시 현대건설, 대우 건설 직원등은 높은 경쟁을 해야 입사가 가능한 직업군이 속한 직장으로 분류된다. 이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서 필히 건설 기술자로 중동을 가려는 청년들로 붐비던 시절이 찾아온다. 이들은 로비를 해서라도 중동에 조적 기술자, 목공 기능인, 철공 기능인, 벽돌 기능인, 중장비 기술자로 취직하기를 원한다. 대학을 나와도 고시, 대기업등 몇 군데 직장을 찾고 나면일자리가 부족하던 시절, 학사 출신들도 자격을 취득해서 중동에 기술자로 갔다.
수출만이 살길. 유신정부가 1974년에 들어선 후 수출통상 전문 관료, 무역인은 인기를 최고로 얻는다. 당시에는 대우, 삼성물산, 현대 종합 상사들이 가장 인기 직장이 된다. 무역을 하면서다.
대외 개방이 늘면서 스튜어디스, 조종사가 인기를 얻는다. 철강 엔지니어, 기계기술자들이 인기를 얻는다. 중화학 산업이 증가 하면서 화공 엔지니어인기도 올라간다.
1980년대
은행원 증권 회사 직원이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높은 보수가 골드 미스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성공은 스포츠 스타를 인기직업으로 올린다. 야구 선수는 물론 이 중에서 특히 야구 피처, 야구 투수가 프로구단이 생기면서 인기 직업인이 된다.
반토체 메모리 엔지니어, 선박 엔지니어 등이 인기 직업으로 성장세를 유지한다. 제조업의 성장은 광고 카피라이터 광고 전략가, 광고 모델의 인기를 올린다. 1980년대정치 상황에 환멸을 경험한 대중들은 당시 드라마의 강세를 보이면서 텔레비전 프로듀서, 텔런트의 인기를 올린다.
1990년대
컴퓨터 산업의 성장은 우리 한국에서 웹디자이너, 게임 디자이너, 게임 홍보 전문가의 위상을 높인다. 1992년의 서태지의 등장으로 음반 기획가, 가수 등의 직업적인 인기를 매우 상승한다.
화장품 산업의 성장은 향장 수출전문가. 자원 문제전문가의 수요도 증가시킨다. 기업의 경영 자문을 주는 경영 컨설턴트가, 1997년 외환위기를 체험하면서 교사, 공무원, 약사, 공사직원 등이 인기 직업으로 더욱 성장한다.
2000년대
컴퓨터 그래픽디자이너의 성장은 영상 산업의 기초를 제공한다. 외로운 인구의 증가로 애완견 의상디자이너, 노인 복지 정책 전문가. 트랜드 컨설턴트의 인기를 올린다.
2010년 이후
융합 시대가 되면서 뇌과학자. 로봇 드라마 연구원의 인기가 올라갈 것이다. 기상문제 전문가, 극미세 기술을 이용한 나노 과학자, 시나리오 디벨로퍼, 라이프 코치, 여가 상담가, 심리 컨설턴트, 브랜드 네임니스트, 재즈 아티스트, 싱어송라이터 등의 인기가 상승할 것이다.
김준성 연세대 직업 평론가 nngu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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