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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58>사회학자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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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8-26 10:42:48 수정 : 2010-08-26 10: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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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있는 문제의식·교육으로‘미래의 통일한국’ 준비해야
학자나 학문이 특정 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시기에 불현듯 떠오르는 학자가 있다. 사회학자인 신용하(73) 한양대 석좌교수도 그런 학자다. ‘독도 영토 주권’이나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지면 그의 자문을 구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광복절을 즈음해 학술 신간을 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2년 전 광복 60주년을 즈음해 만났으나, 그의 신분이 바뀐 것은 전화통화로 알게 됐다. 지금은 한양대 석좌교수이지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화여대 석좌교수였다. 1937년생인 신 교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묵직했다. 그는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민족의 기원과 최초의 고대국가 형성을 밝히는 연구가 중요하다”며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인터뷰 약속을 잡고, 그의 신간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지식산업사)를 구해 펼쳐보았다. 신간은 1976년 첫 책 ‘독립협회연구’(일조각)를 낸 이후 ‘신용하 저작집’으로 출간된 53번째 저서다. 한 세대 동안 민족연구 분야에서 그가 이룩한 성과는 ‘신용하 저작집’ 외에도 ‘독도 이야기’(살림) 등 여러 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실을 찾다 보니, 민족주의 사회학자 돼”

신간에 드러난 “민족과 고대국가 형성의 기원을 밝혀야 역사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신 교수의 설명에 수긍할 수 있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70대 노학자의 삶이 존경스러웠다. 언론과 대중이 그를 민족주의 계열의 사회학자로 평가하는 게 타당하게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혹시 그가 일본이나 중국의 학자였어도 이런 접근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보았다. 한양대 도서관인 백남학술정보관으로 오르면서 그의 발언이나 주장이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인정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국적을 불문하고 학자가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사실과 진실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다”며 그 예로 한일병합 조약을 든다. 신 교수는 “100년 전에 체결된 한일병합 조약은 애초에 불의·부당한 것으로 원천적으로 무효”라며 “일부이지만 일본의 학자들이 우리 학계의 설명에 공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제원 기자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신용하 문고’로 지정된 방문을 열자, 백범기념관과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예전에 접했던 그의 환한 얼굴이 책꽂이 속에서 드러났다. 한양대에는 그가 기증한 책들이 두 군데에 있다. ‘신용하 문고1’과 ‘신용하 문고2’에 1만2000여권이 있고, 앞으로 그가 주로 머물 사회과학연구실에도 3000여권의 전문서적이 자리하고 있다.

“독도와 동북공정, 고조선의 국가형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구영역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 학자적인 소명의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우문을 던졌다. 머리를 치는 현답이 돌아왔다.

“언론이나 대중이 나를 민족주의 사회학자로 부르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나는 민족주의 학자도 아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어요. 민족에 관한 진실을 밝히다 보니,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한국 학계의 설명이나 고증이 타당한 것이라는 걸 증명한 셈이기는 합니다. 가정이지만, 내가 일본이나 중국 학자였더라도 ‘독도는 한국땅’이라거나 ‘고조선과 고구려는 한국 역사’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을 것입니다.”

불현듯 미국인 진보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과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하워드 진은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건 조국·국민이지 어쩌다 권력을 잡게 된 정부가 아니라고 설명하려 애썼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은 독립선언서의 원칙들을 신봉하는 것이다. 어떤 정부가 이런 민주주의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 정부는 비애국적이다.” 조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게 하워드 진의 가치관이다. 그보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더 사랑한다는 설명이기도 하다.

#자각 있는 문제의식이 학자의 사명

신 교수는 학자의 첫 자세로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꼽는다. 그는 “선배 세대에 비해 요즘 학자들은 해외정보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다”며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하면, 누구든 사회나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연구도 그래서 필요하다.

“일본은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교과서 기술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했다가, 중학생을 거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이런 교육을 받은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성인이 될 때면, 일본은 독도를 자기 영토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응책은 무엇입니까. 동북아역사재단 산하에 독도연구소가 있지만, 이곳에서 내놓은 것은 어디까지나 행정적 대응에 불과해요. 학계 자체적으로 독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요. 그게 진실을 연구해야 하는 학자들의 학문적 의무입니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민족’을 주제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학자로서 삶을 이어왔던 그의 과거를 듣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그의 고향은 제주. 1945년 7월 제주 동부지역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제주 지역에 소개령이 내려진 뒤 그는 충남 신도안(계룡시)에 정착했다. 8살 나이에 뭍으로 나온 이후,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 참화를 겪었다. 전쟁 발발 한 달 전인 1950년 5월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를 도와 어린 세 동생을 돌보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공부에 대한 열망도 놓을 수 없었다.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경험이 배경이 됐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의문을 품게 됐어요. 그러면서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지요. 사회학 중에서도 민족문제에 중심을 두며 공부하고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 대한 다른 민족의 부당한 도전을 주제로 공부를 계속했지요. 민족 불행의 원인에 분단이 있었고, 분단 원인을 밝히려니 일제시대와 주권침탈의 과정도 살펴봤고, 보다 앞선 시기인 19세기 한민족의 상황과 사회사도 들여다보게 된 것이지요. 정년퇴임하고 나서는 고조선에 대한 연구까지 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자각과 교육으로 미래의 통일한국 준비해야

섬에서 뭍으로 나온 고아 소년 신용하는 책을 읽고, 학교 공부에 몰두하며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면도하느라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 수염을 기를 정도였다. 대학원을 졸업하자 스승들이 바로 교수로 발탁했다. 그때가 1965년으로, 그의 나이 만 28살이던 때였다. 1961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학사모를 썼으니 빨라도 한참 빨랐다.

“공부 열심히 한다고 당시 선생님들이 좋게 봐준 것 같아요. 고마운 일이지요. 나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이처럼 잘살게 된 것은 교육 덕분입니다. 약간 주춤하고 있지만, 길게 본다면 남북 전체적으로 도약기에 들어선 것은 사실이에요. 우리 국민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탁월해 통일이 되면 일본을 능가하고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오를 것입니다.”

섬 소년이었던 그가 교수로 정년퇴임 한 뒤에도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 교육의 힘 덕분이었다. 한국 민족은 불행했지만 어려웠던 시절에도 많은 이들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땀을 흘렸다. 그 덕분인지 우리 사회는 신 교수처럼 열심히 공부한 이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줬다.

“공부 열심히 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사회가 저에게 준 기회가 너무 많아요. 정년퇴임한 뒤에 한양대에서 석좌교수로 지냈고,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거쳐 다시 한양대로 왔습니다. 한양대는 내 이름을 딴 도서관도 만들어 주었어요. 책을 기증하면 대개 버리는데, 공간을 내어 ‘신용하 문고’라고 이름까지 붙여줬으니 더 열심히 연구해야지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사회가 그에게 베푼 게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신 교수는 우리 사회의 자존심을 드높였고, 민족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만큼 공로가 크다. 그의 말처럼 한국은 세계로 뻗쳐나갔고, 개방·자유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패기 있는 나라로 성장했다.

“학문적 양심에 따라 연구하다 보니, 민족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는 그의 고백과 달리, 신 교수는 애초부터 민족주의 사회학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연구실을 나서면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가슴을 파고든 그의 말은 이랬다.

“지금의 40대와 50대는 ‘통일 한국’이 세계를 선도해 가는 나라에서 살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자각 있는 문제의식을 갖고 미래를 맞아야지요. 학문의 문제의식도 결국엔 불행했던 한민족을 구하는 과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bali@segye.com

■ 신용하 교수는…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1937년 제주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사회학 박사 학위 취득. 서울대학교 교수와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을 지냄. 백범학술원 원장과 한성대학교 이사장 역임. 독도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백범 김구 사상의 전파에 힘을 쏟는 민족주의 성향의 사회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 근대사와 사회 변동’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 연구’ ‘동학과 갑오 농민전쟁 연구’ ‘한국 현대사와 민족 문제’,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주장 비판’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독도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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