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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_정길재] |
태양의 위치가 바뀌자 진리부의 수많은 창문들은 더 이상 햇빛에 빛나지 않고, 마치 요새의 총안처럼 무시무시하게 그 모습을 바꿨다.
윈스턴은 펜에 잉크를 찍고 잠시 머뭇거렸다. 책상 위에는 크림색이 도는 공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 공책은 4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도시 빈민가의 한 고물가게에서 구입한 것이다. 윈스턴은 거기에 일기를 쓸 참이었다. 만일 그 일이 당에 발각되면 적어도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벽 한쪽이 움푹 들어간 보기 드문 방의 구조 덕분에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도시 전체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송수신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텔레스크린은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모든 소리와 영상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상경찰에게 전달되었다.
서른아홉 살의 윈스턴 스미스는 런던의 승리맨션 7층에 살았다. 런던은 미영합병국인 오세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큰 대도시였는데 승리맨션은 런던의 행정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붕 위에 올라가 도시를 바라보면 네 개의 정부기관 청사가 동시에 보였다. 그중에서도 윈스턴의 일터가 있는 진리부는 지상에 3000개의 방이 있고 지하에도 그와 맞먹는 분실이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보도, 연예, 교육 등을 관장하는 진리부 외에도 전쟁을 관할하는 평화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 그리고 경제문제를 책임지는 풍무부가 있었다.
윈스턴은 작고 서툰 필체로 공책에 썼다.
‘1984년 4월4일’
1984년,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전쟁 중이었고 동아시아와는 동맹을 맺고 있었다. 윈스턴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진리부의 하급관리로 갖가지 기록문서들의 처리를 담당했다. 메모부터 각종 기사와 메시지들이 그의 손을 거친 후 기송관으로 보내졌다. 윈스턴은 그 과정에서 보관되어야 할 기록들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것은 과감히 ‘기억구멍’이라 불리는 소각로 속에 던져 넣는 일을 맡고 있었다.
2+2=4
“단조로운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지?”
나는 반복되는 윈스턴의 일상을 지켜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이 업무의 중요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난 지금 오세아니아의 역사를 만들고 있는 셈이지. 지우고 다시 고쳐 쓴 양피지처럼 내 손을 거쳐 폐기돼 버린 기록들은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거야. 고쳐 쓴 거짓말들이 영구문서로 남아 진실이 되는 거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어?”
“가능해. 최근엔 ‘오길비’라는 가공의 인물을 실존인물로 둔갑시키기도 했거든. 나는 그의 일생을 창조했지. 빅브라더에게 칭송을 받을 만한 업적과 일대기를 만들고 영웅으로서의 장렬한 죽음까지 조작해냈으니까. 하지만 특별훈장을 주려면 까다로운 대조를 거쳐야 하고 일이 많아져서 포기해버렸지. 오길비 동무는 이제 줄리어스 시저처럼 명백한 증거 위에 실존하는 역사적 인물이 됐어.”
윈스턴은 기억구멍 속에 한 뭉치 서류를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산 사람은 날조가 안 돼. 그건 이미 죽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점심시간이 되자 윈스턴은 매점에서 친구 사임을 만났다. 사임은 언어학자이자 신어전문가로 조사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 정통파에 속한 사임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즐겼다.
“신어만이 세계에서 해마다 어휘가 줄어가는 유일한 언어라는 걸 알아?”
윈스턴은 동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해가 갈수록 낱말 수는 줄고 인간의 의식 범위도 줄어가는 거지. 모든 과거의 문학도 깡그리 없어질 거야. 당의 슬로건도 사라지고, 사상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을 거야.”
윈스턴은 사임의 발언들이 위험한 수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머지 않아 사임도 증발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당은 어색한 표정부터 말, 행동 하나하나까지 사람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욕과 악다구니와 고함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무산층에게는 반대로 모든 것이 허락되었다. 당의 슬로건이 드러내듯 무산층과 동물은 자유였다.
윈스턴은 일기에 썼다.
‘세상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게만 있다.’
명백한 것, 순박한 것, 그리고 진실한 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자명한 것은 진실하며 그것은 사수되어야 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은 심지어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생활까지 간섭했다. 결혼의 단 한 가지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기 위해서였다. 그 외 사랑의 행위들은 마치 관장처럼 역겨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완벽한 금욕을 고취시키는 청년반성동맹 같은 단체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윈스턴도 금욕주의자인 아내와 십 년이 넘게 별거 중이었다. 아내의 머릿속에는 오직 당의 슬로건뿐이었다. 윈스턴은 거리로 나서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일기장을 구입했던 고물가게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산호가 박힌 문진 하나를 구입했다.
다음 날 아침, 윈스턴은 진리부의 복도에서 한 여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창작국 소속으로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여자였다. 4미터쯤 가까워졌을 때 여자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윈스턴은 달려가 물었다.
“다쳤습니까?”
“괜찮아요. 잠깐 아팠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씩씩하게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사건이 벌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30초 정도였다. 그런데 2, 3초 동안에 여자는 윈스턴의 손바닥에 재빨리 쪽지 하나를 밀어 넣었다. 당황한 윈스턴은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들 사이에 쪽지를 흘려놓고 고민했다. 어쩌면 여자는 사상경찰이나 지하조직 소속일 수도 있었다. 그는 쪽지에 쓰여진 내용이 협박이나 소환, 자살 명령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윈스턴은 다른 엉뚱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상상했다.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고 그는 다음 일거리를 끌어당겼다. 쪽지는 그 위에 있었다. 거기에는 맵시 없는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전쟁과 평화 사이
윈스턴이 가장 두려운 것은 그녀의 변심이었다. 가능한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매번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녀를 놓쳤다. 그러다가 식당에서 그는 그녀와 마주 앉을 기회를 잡았다. 쉴 새 없이 입에 음식을 넣으며 사이사이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드디어 그들은 재회를 약속했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승리 광장은 갑자기 몰려든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마침 유라시아 포로들을 실은 수송차량이 광장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아우성과 우르릉거리는 트럭 소리 사이로 그들은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군대식으로 밀회장소를 설명했다.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들은 두 손을 맞잡았다.
윈스턴은 햇빛과 그늘이 얼룩진 오솔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숲속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는 서른아홉이오. 떨쳐낼 수 없는 아내가 있고, 그리고 정맥류성궤양도 있소. 의치는 다섯 개나 해 박았고.”
“상관 없어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곳은 텔레스크린은 물론이고 도처에 숨겨져 있는 마이크로폰도 없는 안전지대였다.
“이름이 뭐죠?”
“줄리아예요. 당신 이름은 알아요. 윈스턴 스미스.”
줄리아는 솔직하고 관능적이었다. 윈스턴은 바로 그런 동물적인 본능과 단순한 욕망이 당을 박살낼 힘이라고 생각했다. 줄리아는 모든 문명을 멸망시켜 버릴 듯 눈부신 육체를 갖고 있었다. 내부당원들과도 여러 번 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윈스턴은 줄리아 또한 자신처럼 당과 현실에 회의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의 포옹은 전쟁이었고 절정은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뭐래도 정치적 행동이었다. 윈스턴은 순결과 정치적 정설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성 본능을 억제하는 당의 의도가 공포와 증오, 광적인 맹신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그런 대화를 원치 않았다.
“보세요, 이것이 나예요, 이게 내 손이고 다리고, 난 실존하고 있어요. 나는 확고하게 살아있어요! 이런 게 안 좋아요?”
두 사람의 만남은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을 피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밀회장소는 언제나 고물가게 이층 방이었다. 산호가 박힌 유리 문진을 들여다보며 그들은 시간이 멈춘 그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행운이 영원히 지속되어 여생을 이렇게 밀통하며 살 수 있으리라 상상해보기도 했다.
마지막 인간의 선택
사임이 사라졌다. 사임의 모든 기록도 그와 함께 폐기되었다. 사임은 존재하기를 그쳤고, 과거에도 존재한 일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서 깨끗하게 제외되었다.
윈스턴은 줄리아와 함께 오브라이언을 찾아갔다. 단 한 번 마주친 시선과 애매한 언급에 기대어 그는 오브라이언을 정치적 공모자로 확신했다. 내부당원인 오브라이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윈스턴을 맞았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이 비밀조직의 가담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신 또한 기꺼이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스스로 사상범이며 간통자임을 인정했다. 오브라이언은 엷은 미소를 띠며 윈스턴의 고백을 다 듣더니 반역자 골드스타인의 책을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증오 주간의 엿새째 되는 날, 윈스턴이 런던의 중심가에서 데모에 참가하고 있을 때였다.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전쟁 중이 아니라는 발표가 났다. 오세아니아는 동아시아와 전쟁 중이었다. 그 사실은 불길처럼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지난 5년 동안 나온 무수한 정치문서가 한꺼번에 소각로로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골드스타인의 저술은 체계적이고 용감했다. 윈스턴은 책을 모두 읽은 후 줄리아와 함께, 텔레스크린도 마이크로폰도 없는 고물가게의 이층 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은 체포되었다.
그곳은 오브라이언의 암시대로 그야말로 어둠이 없는 곳이었다. 눈부신 조명이 비취는 애정부의 감방에서 윈스턴은 밤낮 없이 고문에 시달렸다. 곤봉 세례, 쇠몽둥이 찜질, 발길질 같은 매질이 쉴 새 없이 계속되었다. 그의 입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고 손은 서명의 도구로 쓰였다. 윈스턴은 하지 않은 모든 일까지 기억해내서 자백했다. 얼마 후 고문실에서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을 만났다. 오브라이언은 잔혹한 심문자였다. 고통의 강도가 점점 높아갈수록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에게서 공포와 동시에 존엄함을 느꼈다.
“진정한 권력은, 우리가 밤낮 없이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권력은, 사물에 대한 권력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권력이야.”
윈스턴은 모든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윈스턴은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나는 줄리아를 배반하지 않았소.”
악명 높은 101호 고문실에서 윈스턴은 가장 큰 두려움과 마주했다. 오브라이언은 말했다. “쥐야. 설치류지만 고기도 먹네. 이놈은 신기하게도 사람이 무력해진 때를 아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어.”
굉장히 큰 쥐였다. 윈스턴의 머리 위로 새까만 공포가 덮쳐왔다. 우리 문이 열리면 굶주린 살인쥐는 곧장 윈스턴의 얼굴 위를 덮치게 돼 있었다. 순간 윈스턴은 벼락을 맞은 듯 깨달았다. 그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줄리아한테 해요! 내가 아니야! 줄리아야! 그 여자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단 말이에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고, 뼈다귀가 나올 때까지 해치워요. 내가 아냐! 나는 안 돼!”
그리고 그는 끝없는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도 끝났다. 그는 자신을 이긴 것이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작가와 작품 소개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1903년 인도 벵골에서 영국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이튼학교에 입학해 장학생으로 교육받았고, 졸업 후 1922년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왕실 경찰로 근무했다. 하지만 식민체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견디지 못하고 5년 만에 경찰직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파리와 런던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르포르타주 처녀작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1933)을 발표한다. 곧이어 버마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첫 소설 ‘버마 시절’(1934)을 출간하며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영국 탄광촌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과 스페인 내란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카탈로니아 찬가’(1938) 외에도 다수의 에세이와 평론을 통해 예리한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1945년에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에 대한 정치 우화 ‘동물농장’을 출간하며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즈음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요양과 입원을 거듭했고, 그러면서도 작업을 계속하여 디스토피아 3대 걸작 중 하나인 ‘1984’(1949)를 완성한다. 이듬해인 1950년 1월, 마흔일곱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옮긴이 김기혁은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연구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화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굿바이 미스터 칩스’가 있고, 지은 책으로 ‘서울설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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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

윈스턴 스미스에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101호 고문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후 나는 한동안 생각했습니다.
윈스턴 당신의 101호실에는 갈색털을 지닌, 늙고, 사나운, 굉장히 큰 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고문관인 오브라이언이 말했지요.
“고통을 주는 것만으로 반드시 다 되는 게 아냐. 인간이란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고통에 대항해서 버티는 경우가 때로 있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참아낼 수 없는 것,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자네에게는 쥐가 참을 수 없는 거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쥐는 압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거야. 자네는 자네한테 요구되는 일을 하게 될 걸세.”
당신의 귀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은 완전한 고독 속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지요. 나는 당신의 심연 맨 밑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한 마리 짐승을 보았습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서 당신의 내면을 뚫고 습격한 적. 무시무시한 공포의 침공이었습니다.
윈스턴 당신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순간, 내게도 갈색 쥐의 공포가 덮쳤습니다. 분홍색 앞발과 뾰족한 수염과 노란 이빨, 아가리 속의 새까만 정적이 해일처럼 밀려왔습니다.
당신이 줄리아의 이름을 외치며 쓰러질 때 내 가슴 한 켠에서도 서늘한 총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찢어질 듯한 비명도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사살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차마 무참해서 거두지조차 못한, 우리들의 그 싸늘한 시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내 안에 잠든 주검의 얼굴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밤나무 카페에서 다시 줄리아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움도, 욕망도 죄책감도 없는 허무한 만남이었습니다. 무엇인가가 죽어버렸고 타버렸고 마비돼버렸습니다.
당신은 매일매일을 술로 연명하며 살았습니다. 이따금씩 들리는 전황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포로와 전리품과 살육의 이야기도 음악소리처럼 흘려 들으며 행복한 몽상에 잠겼습니다. 한때는 인간정신의 마지막 수호자로 불렸던 당신. 당신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인간이라는 껍데기, 공허한 실존 뿐이었습니다.
하얗게 표백된 영혼으로 당신은 긴 복도를 걸어갔습니다. 총을 든 간수가 나타났고 나는 아무런 감정없이 당신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간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소망했던 총알이 당신의 뒤통수를 뚫는 것을, 윈스턴 스미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다, 기체가 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진, 소멸해가는 한 존재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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