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라면 연기를 해야죠. 쉬면 뭐하겠어요. 제게 쉰다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배우 조진웅은 다작배우로 통한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국가대표….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히트작에는 조진웅이 있었다.
브라운관에서도 조금씩 '조진웅' 이름 석자를 새긴 작품이 늘어갔다. 솔약국집 아들들, 열혈장사꾼, 추노에 이어 신불사까지. 불과 2년만에 지상파 TV 드라마에서 쌓아올린 필모그래피다. 각 작품에서 연기하는 캐릭터로 살아가는 동안 조진웅은 듬직한 체구만큼이나 꽤나 존재감 있는 배우가 되어있었다.
서서히 세상도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봐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배우 '조진웅'이라는 이름 석자보다 작품 속 인물 자체로 그를 기억할 때가 많다. 캐릭터와 배우를 동일시할만큼 배역에 완전히 녹아들었다는 말이다.
조진웅은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데뷔한 이래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작품의 감칠맛을 더하는 양념 역할을 해왔다. '솔약국집'의 코믹한 브루터스 리에서 '추노'의 우직한 한섬까지. 양 극단의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연기내공에 '명품 조연' 타이틀도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허나 조진웅은 이같은 수식어가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쑥스러운 듯 웃음을 보였다.
최근까지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조진웅의 이미지는 바로 '추노'의 충복 '한섬'일 터. '추노'에서 송태하(오지호)의 충직한 부하로 개혁을 꿈꾸는 '한섬' 역을 맡은 조진웅은 우람한 체구지만 날렵하게 칼을 휘두르는 강인한 장수의 모습뿐 아니라 궁녀와 절절한 사랑을 나누는 로맨티스트의 면모도 보여줬다.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충복이 아닌 한 여인을 가슴으로 사랑하고, 이것이 또하나의 동기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꿈에 동참하는, 능동적인 충복의 모습을 그려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조진웅은 '추노'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으며 극 중간 하차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한섬'의 여운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드라마 '신불사'에 출연, '한섬'과는 180도 다른 망나니 재벌집 아들로 변신한다. 최근에는 동티모르에 건너가기도 했다. 영화 '맨발의 꿈'에서 단 두 장면을 찍기 위해 푹푹 찌는 동티모르에서 2박3일을 머물렀다.
요즘 근황을 물었다. 예상했던대로다. "재충천은 일하면서 하는 것 아니냐"며 되받아치던 조진웅은 이번에도 휴식없이 연기를 선택했다. 그는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에 캐스팅돼 2주 전부터 촬영에 돌입했다. 빡빡한 촬영이 힘들기도 하련만 새 영화와 강우석 감독과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얼굴에서는 생기가 느껴졌다.
서울 강남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과의 인터뷰는 진솔하고 담백했다. 느릿하지만 또박또박 연기 그리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다음은 조진웅과의 일문일답.
-본명이 조원준이더라. 조진웅으로 이름을 바꾼 계기가 있나.
'진웅'은 아버지 존함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존함이 그저 좋았다. 연극무대 설 때까지는 내 이름을 쓰다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데뷔를 앞두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로 새 이름을 짓고 싶던 차에 아버지 존함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께 이름을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당황하셨다. 가져갈 게 없어서 이름을 가져가냐고 하시더라. 아버지 존함으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 책임감을 많이 갖게됐다. 뭔가 잘못하면 아버지 욕먹이는 것 같아 행동거지에 더 신경쓰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 연기에 입문하게 됐나. 원래 연기에 관심에 많았던 건가.
처음부터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꼬마 때 윤복희 선배님이 연기하는 '피터팬'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어릴 때였지만 마음에 남았었나보다. '연기를 해야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예체능 계열로 갔고,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때는 음악과 글에 관심이 많아 막연하게 그 분야로 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극작가나 음악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가끔 배우라는 포지션의 어려움을 느낀다. 작품 때문에 체중을 조절해야 하고, 상황에 맞게 보여져야 한다는 게 부담스울 때가 있다. 특히 감독님이 '귀엽게 해 봐'라고 할 때면 난감한 순간이 있다. 나이 서른 살을 넘기면서 여러가지 체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도 실감한다. '난 잘생긴 배우 부류로는 안되는구나. 연기하는 사람이지.'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작품 때문에 체중 조절을 했다고 들었다.
작품의 배역을 위해 살을 빼는 것은 배우가 해야할 당연한 몫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촬영을 마쳤을 때 120kg 나갔었다. 이후 안성기 선배의 양아들로 나온 '마이뉴파트너'에 출연하게 됐는데 동네 양아치라 호리호리한 체격이어야 해서 30kg을 감량했다. '쌍화점'에 출연했을 때는 80kg에서 98kg까지 살을 찌웠다. 다음 작품인 '솔약국집' 때는 체중이 이보다 더 나갔다.
-여러 작품 가운데 연기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솔약국집 아들들' 때문에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시는 것 같다. 원래 주말드라마를 안 보는 편인다. 그런데 '솔약국집' 시놉시스가 재미있어 참여하게 됐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손현주 형, 이필모 형 등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따뜻함을 많이 느낄 수 있어 좋은 작업이었다. '솔약국집'에 출연한 뒤 아줌마들이 내게 다가와 'ㅇㅇㅇ 배우시죠?"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솔약국집'의 브루터스로 대해 주시더라.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 최근 개봉한 영화 '맨발의 꿈'에서도 코믹한 교포 역할을 맡았다. 버터 발음이 자연스러운데 캐릭터 연구는 어떻게 했나.
미국에 살아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교포들을 유심히 관찰하다보니 그들만의 디테일이 있는 것 같았다. 이를 참고해 제스처나 발음 등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려고 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
공들였는데 잘 안 된 작품들이 애착이 간다. 잘난 자식은 그냥 놔둬도 잘되는 것 같고, 못난 자식은 좀더 신경이 쓰이지 않나? 잘 안됐던 작품은 '왜 안됐을까' 따져보게 되고 계속 마음에 남는다. 영화 '폭력서클' 포스터를 보면 '모든 걸 잃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았다'는 문구가 있는데 그 영화 찍고나서 정말 모든 걸 다 잃고, 출연배우 여섯 명만 남았다. 지금도 그때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다.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라면 뭐가 있을까.
내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는 글쎄. 닮고싶다는 캐릭터는 있었다. 바로 영화 '폭력서클'의 홍주다. 의리있고 학비를 직접 버는 듬직한 아이다. 나는 그런 부분이 모자라다. 주변사람들도 세심히 못 챙기는 것 같고. 홍주는 친구들이 힘든 일이 있으면 친구집에 찾아가 라면을 함께 끓여먹으며 위안이 되어주는 친구다.
-실제 성격이 어떻길래.
표현이 서투른 편이다. 부모님께 살가운 아들은 아니다. 얼마전 어머니가 아프셔서 찾아뵈러 내려가는 길에 "엄마, 괜찮아? 병원가야지"라고 말하려던걸 "왜 아프고 그래"라고 말이 튀어나왔다. 난 미안하면 화를 내게 되는 것 같다. 고쳐야지.
-술을 좋아할 것 같다. 주변에 친구도 많을 것 같고.
맞다. 술을 좋아한다. 하지만 술먹은 다음날 힘들어서 이제는 많이 못 먹겠더라. 친구들도 많은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가 전부였다.
-여러 작품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줬다. '솔약국집'의 코믹함, '추노'의 우직함, '신불사'의 다혈질 등 연기변신에 능한데 캐릭터를 표현할 때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캐릭터가 뭘 원하는지, 캐릭터를 통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감정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분석적 차원일 수도 있고, 배우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부분이 있다. 이 지점을 찾았을 때 캐릭터를 표현이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나.
내가 봤을 때 재미있는 작품을 선택한다. 그것은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특별히 선호하는 작품이나 장르는 없지만 나름대로 휴머니티한 느낌을 좋아한다. 내가 그렇게 못 살아서 그런가? 그렇게 살고싶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추노'에서 송태하의 심복 '한섬' 역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했나.
기존에도 충성심을 다룬 캐릭터가 많았다. 나는 충성심의 의미를 '한섬'식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충성이 아니라 상관에게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충성을 맹세하는 것,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충성으로 풀이했다.
-'한섬'의 정의로운 모습은 남성팬의 인기를 끌었다. 궁녀와의 로맨스에 여성팬도 부쩍 늘지 않았나.
연예인이라서 어렵거나 멀리 있는 사람 같지 않고 옆집 형, 동생처럼 친근해서 남성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여성팬은 장혁이 다 가져갔는데 뭐.(웃음) 아줌마들이 많이 알아봐 주시는건 거의 '솔약국집' 보고 안쓰러워서 그러시는 것 같다. 식당가면 김치에 참기름까지 챙겨주신다. 아줌마 팬 덕분에 혼자살면서 많은 도움 받고있다. 고마운 마음이다.
-영화 '맨발의 꿈'에서 한국계 호주인 제임스 역으로 출연해 짧지만 강렬한 웃음을 주었다. 단 두 장면을 위해 2박3일 동안 동티모르에 머물렀다는 데 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뭔가.
김태균 감독은 내가 존경하는 감독이고, 출연배우인 박희순도 좋아하는 선배배우다. 하지만 그런 인연을 떠나서 '맨발의 꿈'이 의미있는 작품이라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마침 김태균 감독이 도와줄 수 있겠냐고 요청을 해와 흔쾌히 출연하겠다고 나선 거다.
-강우석 감독의 신작 '글러브'에 캐스팅됐다고 들었다. '글러브'는 어떤 영화이고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글러브'는 시골 고교 야구부를 소재로 한 감동휴먼스토리다. 정재영이 야구선수이고, 나는 정재영의 에이전트이자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친구 역할을 맡았다. 참, 강우석 감독의 '이끼'라는 영화 봤나? 근래에 본 영화 중에 최고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 샘이 날 정도였다. '저런 좋은 영화에 나는 왜 못 꼈지?' 자책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못 끼길 잘했다. 꼈으면 영화를 망쳤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해진, 정재영 등 쟁쟁한 배우들이 연기를 소름끼치게 잘해서 감탄했다.
-닮고싶은 배우는 누구.
너무 많다. 정재영 선배는 자기 관리 철저하시고, 세 번밖에 안 만났는데 아무때나 기대도 될 것 같은 편한 형이다. '신불사'의 송일국, 김민종 선배를 비롯해서 안성기, 박중훈 등 모두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추노' 멤버 중 장혁도 닮고 싶은 친구다. 드라마에서 장혁과 부딪히는 신은 없었지만 오지호의 소개로 친구로 지내게 됐는데 진지하고 연기관이 뚜렷한 배우더라.
-'명품조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연 욕심은 없나?
주연은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위치에 있다. 그를 보고 달려가는 수많은 스탭들에게 책임을 질 수 있는 마인드나 의지가 갖춰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공이 쌓이고 에너지가 축적된다면 주연도 해보고 싶긴 하다. 그런데 막상 주연을 하게되면 좋기보다 겁이 날 것 같다. 사실 주연 제의를 받았지만 겁이 나서 포기한 작품도 있다. 차근차근 준비해가려고 한다. 선배연기자나 후배지만 주연인 친구들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다. 주연을 맡아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맡은 역할과 포지션을 인지하는 것도 배우에게 중요한 작업인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내가 로미오가 되기는 힘들지 않나. 포지션을 이해하고, 나만의 것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배우 조진웅의 꿈은?
계속 광대가 되는 것이다. 자면서 꿈을 꿨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못 걷게 됐다. 그 순간 꿈 속에서 들었던 생각이 '이제 장애인 역할을 해야겠다'였다. 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나는데 꿈 속에서 친구에게 다리 부러진 역할은 다 내게 달라고 말했다. 눈을 떠보니 너무 생생하더라. 그리고 드는 생각이 "평범한 역할도 모두 할 수 있어 다행이다"였다. 안도감과 행복을 느꼈다. 잠들어있는 시간에도 나는 배우인 거다.
/ 정은나리 기자 jenr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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