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여름이면 등장하는 납량물은 색다른 재미를 가져다준다. 한여름에 만끽할 수 있는 여름 휴가지, 수박 같은 제철과일 같은 장르가 바로 납량물이다. 그런데 브라운관이고, 스크린이고 도통 납량물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비해 납량물 제작편수가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공포 소재들도 실험 대신 안정을 추구하면서 단순해졌다. 자연히 ‘골라보는’ 재미가 사라졌다. 때론 신선한 시도가 엿보였던 공포소재를 2010년 TV나 극장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구미호, 학원 공포물 등 검증된 공포소재만 눈에 띈다. 허나 소재는 단순해졌지만 그 내용의 깊이 면에서 성숙해졌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 하다.
◇ 2010 납량코드는 ‘구미호'와 '학교’
올 여름 브라운관에는 '구미호' 열풍이 불어 닥친다. KBS 2TV '구미호, 여우누이뎐'과 SBS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두 편의 드라마가 나란히 선을 보인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현대여성으로 둔갑한 구미호와 인간 남성의 동거동락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공포물은 아니지만 여름이면 방송가의 단골소재로 등장했던 구미호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남자를 유혹해 간을 빼먹는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를 생각했다면 납량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과 어느 정도 부합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2010년식 구미호'는 무섭기만 했던 공포의 대상 구미호를 보다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점이 기존 구미호와 다르다.
극장가 공포영화는 학원물 일색이다. ‘공부의 신’ 김수로, 지연과 '지붕킥' 황정음, 윤시윤이 출연한 '고사2'와 배수빈, 신지수, 남지현 등이 출연한 '귀'가 여름 특수를 노린다.
지난해 여름 개봉한 공포영화 '불신지옥'이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 참패를 맛봤기 때문일까. 올해 극장가 공포물은 어느 정도 흥행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학원물 소재에만 기댄 양상이다. 영화 ‘불신지옥’은 기독교 광신도인 어머니와 신내림을 받아야할 운명인 딸을 중심으로 조용한 공포를 그려냈다. 또 기독교에 대한 광적 믿음과 신내림이라는 전통적 소재를 다뤄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극장가의 또 다른 특색이라면 신인 등용문 역할을 했던 기존 공포물이 안닌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다. 익숙한 학원물 소재에 스타급 배우들이 가세해 관객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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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에 선보인 공포영화 '고사2'와 '귀(鬼)'. |
또 최근 공포물 중 이렇다 할 히트작이 나오지 않는 등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시청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로 만든 작품에 유명배우들을 섭외하는 것은 시청자 혹은 관객의 눈길을 끌게 하기 위한 방책이다.
◇ 공포물, 이유 있는 부진
지난해 MBC는 '거미' 이후 14년 만에 납량드라마 '혼'을 내놓아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 배우 김정은과의 결별공방으로 곤욕을 치르던 이서진의 '이산' 이후 복귀작으로도 화제가 됐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반응은 시원찮았다. KBS가 방송한 '2009 전설의 고향'도 조잡한 CG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등 외면을 당했다.
이는 과거 납량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일방적인 선호가 줄어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굳이 지상파의 납량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케이블채널이나 게임 등의 경로를 통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지상파 TV를 통한 납량물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영화계 또한 최근 히트를 기록한 공포물이 손에 꼽을 정도다. 2008년 '고사'가 저예산 제작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190만 관객을 모으며 선전했을 뿐이다. 성공한 한국공포영화로 평가받는 '여고괴담' 시리즈는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제작됐고, '장화, 홍련' 역시 2003년 제작된 영화다.
이에 최근 몇 년 사이 국산공포영화 제작 편수도 급격히 줄었다. 올해 공포영화는 '귀'와 '고사2' 단 두 편만 제작됐다. 2008년에는 '고사:피의 중간고사' 단 한편만 개봉했다. 지난해에는 '요가학원' '불신지옥' '여고괴담5-동반자살' '4교시 추리영역'이 개봉했다. 지난해 갑자기 개봉한 공포영화가 늘어난 것은 2008년 '고사'의 성공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공포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줄어든 것은 대다수의 한국 공포물이 여름 한철을 노리고 졸속으로 제작된 탓이 크다. 그저 국산공포영화는 공포라는 장르만으로 여름철 관객을 끌어모으려 할 뿐 빈약한 스토리와 메시지가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감동적인 영화를 찾는 관객이 늘었다는 것도 작용했다.
◇ 내용에 깊이를 더하다
"예전에 나왔던 단순한 구미호 얘기가 아니었다. 10살 된 딸이 있는 구미호다. 딸에 대한 모성애를 지닌 구미호라 매력적이었다.(한은정)"
"구미호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대본을 받고 내러티브가 탄탄해 출연해야겠다고 맘먹었다. 공포로만 접근하지 않고 구미호라는 소재를 빌어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다.(장현성)"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두 배우인 한은정과 장현성은 '전설의 고향'의 단편소재였던 구미호와는 다른 인간적인 구미호 캐릭터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첫 방송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인기드라마 '동이'와의 경쟁에서 7.5%라는 의미 있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포털 방송부문 인기검색어 순위에서 경쟁드라마인 '동이'를 제쳐 폭발적인 시청자 관심을 반영했다. 시청자 반응도 호의적이다.
톱스타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어찌 보면 진부한 소재인 '구미호'에 휴머니즘을 가미, 창의적인 스토리로 엮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컴퓨터 그래픽과 출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돼 작품성 있는 납량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첫 주 방송이 나갔을 뿐이다. 산뜻한 출발이지만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고 있다. 드라마 초반의 참신함을 끝까지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 너무 많은 것을 풀어내 극 중후반에 맥이 풀리지 않도록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해보인다.
올해 극장가는 학원공포물 일색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비슷비슷한 소재 속에서 경쟁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형식이나 내용, 메시지 면에서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영화 ‘귀’는 공포물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한 것도 차별화를 꾀하기 위한 장치. ‘귀(鬼)’라는 주제에 맞춰 구성된 이야기가 다양한 맛의 오싹함을 선사하려는 의도이다.
기존 공포물이 단순히 영상이나 소리로 공포를 유발하는 것에 목적을 뒀다면 올해 학원공포물에서는 입시지향이나 공교육 문제 등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현상을 되짚는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교육문제들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 두려움의 대상인 공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 정은나리 기자 jenr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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