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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지옥의 입구에서 그 소년이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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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5-13 17:26:24 수정 : 2010-05-13 17: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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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핏빛 자오선'

 

빛과 어둠의 대화

그는 결코 자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래 전의 그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나는 삼십 년이 지난 후 한 술집에서 어느덧 마흔 중반의 나이가 되어 있는 한 남자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남자의 앞에 앉아 있는 판사를 보았다.

“마지막 진실이야. 마지막 진실. 나와 널 빼고는 모두 죽었군, 안그래?”  

판사가 빈 잔에 술을 가득 붓더니 중년 남자 앞으로 밀쳤다.   

“마시게. 쭉 들이켜. 오늘밤 그대의 영혼이 그대를 필요로 할지도 모르니.”         

나는 불길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판사는 내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진실이 무엇인지 곧 알게 될 거야. 누가 옳았는지 말이지.”        

판사는 줄곧 자신이 이 내기에서 승리할 것임을 장담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두고 볼 일이었다. 나는 소년이 끝내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판사가 남자에게, 아니 소년에게 말했다.          

“처음 자네를 봤을 때 첫눈에 알아봤지만 자네는 날 실망시키고 말았지. 그때도 지금도. 그래도 마지막에 여기서 이렇게 함께 있으니 좋군그래.”    

“함께 있는 거 아닙니다.”   

“그래, 좋아. 그럼 우리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해두지.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지. 자기 운명을 알고서 일부러 반대의 길을 택한 자들도 결국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운명을 맞게 되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오.”  

 “그 말은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욱 진실하다네. 하지만 이 말을 해주고 싶군.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다네.” 

“머저리 짐승도 춤을 출 수 있소.”     

판사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뒷문으로 나가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판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다시 빛 가운데 홀로 앉아 있는 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치고 무력해 보였으나 한편 여전히 강하고 초연했다.        

 거짓과 폭력의 역사

 막 도살된 시신들 위로 거멓게 고인 어둠을 뚫고 한 소년이 달리기 시작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까지 한시라도 빨리 계곡을 벗어나야 했다. 

오래 전 집을 나올 때도 그랬다. 술 취한 아버지와 누이가 잠들어 있는 그 집을 생애 마지막으로 보고 돌아선 후로 소년은 계속 달려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쫓기고 도망치면서 살아남기 위해 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고향 테네시에서 출발하여 일 년 후 세인트루이스와 뉴올리언스를 거쳐 급기야 미국 서부 지역의 무법천지인 내커도처스 시내에 이르기까지. 
1849년 봄이었다.

소년은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천막 안에서 우연히 ‘판사’로 불리는 사내를 만났다. 족히 210센티미터는 될 법한 장신으로 몸집이 거대한 대머리 사내였다. 그는 한창 개신교의 부흥집회가 열리고 있는 중에, 불쑥 끼어들어 설교 중이던 목사를 지목하며 ‘저 자는 수배 중인 범죄자’라고 외쳤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과거에 목사가 저질렀다는 끔찍한 악행과 죄상들이 열거되자 회당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목사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일거에 분위기를 장악하며 보다 더 구체적이고 추악한 사례를 들어 군중을 설득했다. 순식간에 천막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함과 욕설이 터지더니 얼마 안가 난투극이 벌어지고 총성이 울렸다.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인해 천막은 곧 무너지고 말았다. 한참 후 소년은 판사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소년은 술값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취객과의 싸움 끝에 누군가 휘두른 곤봉에 맞아 진창에 처박혔다. 소년이 눈을 떴을 때는 환한 대낮이었다. 비는 그쳤고 진흙으로 얼굴이 범벅된 한 남자가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드 빈이라 불리는 그 남자는 소년을 데리고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밤에 소년을 구타했던 남자를 찾아가 머리채를 잡고 소리쳤다. “걷어차! 봐줄 것 없이 막 걷어차라.” 소년은 남자를 힘껏 걷어찼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장밋빛 대지에서  

 벡사의 한 술집에서 소년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바텐더가 나무망치를 들어 공격하려 하자 소년이 술병을 쳐들어 그의 두개골을 가격했다. 주저앉는 바텐더의 눈에 뾰족한 유리조각이 박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년은 화이트 대위가 이끄는 미국 부대로부터 입대 권유를 받았다. 인디언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정규군이었다. 화이트 대위는 무정부 상태에 놓인 멕시코의 위기를 틈타 하루 빨리 미국 국경에 인접한 소노라 지역을 함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에 얻게 될 전리품과 땅에 대해 설명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소년은 새 마구와 소총을 받은 후 간밤에 죽은 병사의 말을 타고 군인들을 쫓았다.        

한낮의 열기가 이글거리는 평원에는 노새 해골과 인간의 뼈가 줄을 이어 나타났다. 밤에도 행군은 계속되었다. 창공을 가르던 별들이 칠흑 같은 산 너머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튿날 오후, 인간의 뼈로 만든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화려하고 기괴하게 치장한 인디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타났다. 소총에 화약을 재고 권총에 탄창을 갈 새도 없이 삽시간에 죽음의 그림자가 군인들을 덮쳤다. 몇몇은 창에 꿰뚫려 선 채로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거나 칼과 창이 꽂혀 비틀비틀 피를 토하며 죽었다. 야만인들은 두개골에 칼날을 박아 벗겨낸 머리 가죽을 하늘 높이 쳐들고 시신들의 몸을 조각조각 썰더니 몸통에서 꺼낸 창자와 성기를 두 손 가득 그러쥐었다. 사방에서 신음과 헛소리가 아우성치고 쓰러진 말이 비명을 질러댔다.

백열하는 태양과 창백한 복제품인 달은 최후의 심판일이 끝나고 불타 버린 세상 위로 뻥 뚫린 구멍의 양끝 같았다.

 
인간 사냥꾼들 

생존자는 모두 여덟 명이라고 했다. 죽은 말 아래서 겨우 목숨을 보전한 병사가 말했다. 두 사람은 시신으로 가득한 폐허의 마을을 거쳐 민간인의 마차를 얻어 타고 남쪽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소년은 참담하게 죽음을 맞아 술단지 속에 던져진 화이트 대위의 머리통을 발견했다. 마을 주민들이 몰려와 소년을 낡은 우리에 가두었다.        

그러나 소년은 주도의 감옥에서 재회한 토드빈의 기지로 곧 풀려났다. 토드빈이 비밀리에 용병을 모집하는 거래에 소년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주지사에 의해 특별 고용된 군인들로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된 인간사냥꾼들이었다. 거기서 소년은 다시 홀든 판사와 마주쳤다. 판사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조종했다. 우연히 만난 마술사 가족이 판사를 향해 저주의 점괘를 외치자 그는 마치 거대한 정령인 양 일어서서 바람 부는 황야에 모닥불의 불꽃을 일으켜 세웠다.        

 창백한 첫새벽에 부대는 다시 출발했다. 죽음의 행군이었다. 용병 일행은 화산 지대와 고원을 가로질러 끝없이 나아갔다. 전직 신부인 토빈은 소년에게 흥미진진한 판사의 활약상을 들려주며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토빈의 말에 의하면 판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자로 5개 국어에 능통하며 춤과 악기 연주는 물론이고 사격, 사냥 등 불가능한 일이 없는 만능의 존재였다. 또한 부대가 아파치들에게 쫓겨 화산 지대 한 가운데 포위됐을 때는 신기에 가까운 조화술을 부려 화약을 제조해내기도 했다. 소년은 그제서야 무리가 판사를 추앙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판사는 어디에서든 자주 기록을 하고 스케치를 했다. 하루는 테네시 출신의 웹스터가 판사를 지켜보고 있다가, 대체 그런 것을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판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그것들을 인간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책에 적힌 운명은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거짓 책이며 절대 책이 아니라고 했다.

내 책에 그려지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담겨지고, 그러한 끝없는 존재의 복잡함 속에서 이 세상의 끝까지 목격되는 거라네.

고원을 지나고 폐허가 된 아파치 마을을 지나 부대는 남쪽을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적의 위치가 파악되자 인간사냥꾼들은 작전을 개시했다. 개미 한 마리 살려 보내지 말라는 판사의 지시대로 그들은 생가죽으로 만든 타격기를 휘두르며 부락을 급습했다. 개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열아홉 명의 게릴라들은 잠든 채 누워 있던 천 여 명의 영혼을 박살냈다. 채 일 분이 지나지 않아 사방에 살육이 만연했다. 군인들은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난도질했으며 군마로 짓이기고 순식간에 마을 전체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시체들이 물가에 나뒹굴었다. 호숫가는 피와 내장으로 뒤덮혔으며, 군인들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시체 사이를 거닐며 검은 머리털을 수확했다. 시커먼 피웅덩이들마다 제각각 자그마하고 완벽한 태양 하나씩을 머금고 있었다.  

부대는 아파치의 흔적을 쫓아 국경지대를 떠돌았다. 그들은 평원을 기지 삼아 끊임없이 도륙을 계속했다. 도시의 거리에서 백주에 총질을 해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적은 비단 인디언 뿐만이 아니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휘둘렀다. 

  
영혼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 차례의 임무를 마치자 용병대는 다시 국경 지대에서 소노라 주지사와 새 계약을 체결했다. 살육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판사는 서서히 그 본색을 드러냈다. 용병들조차 끝없는 전쟁에 지쳐가면서 판사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판사는 전쟁이야말로 인류가 실행해야 할 궁극적인 과업이라고 말하며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전쟁은 가장 진실한 형태의 예언이야. 전쟁은 바로 신이야.”  

 전직 신부인 토빈은 판사의 말에 반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콜로라도 강가에서 용병부대의 운명도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유마 인디언을 공격해 나룻배를 탈취한 글랜턴 일행은 결국 유마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종말을 맞았다. 글랜턴은 황동 침대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다가 늙은 추장이 내리친 도끼를 맞고 죽었다. 그러나 판사는 청동 곡사포를 옆구리에 끼고 인디언들을 위협하며 당당히 무간지옥의 마을을 벗어났다. 

 유마 인디언이 추격하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쫓기며 광대한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섰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분홍 살갗을 드러낸 판사가 나타났다. 마른 흙이 가발처럼 들러붙은 몰골로 판사는 한 손에 자그마한 가방을 들고 온몸에는 고기를 두른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무기를 지닌 사람은 오직 소년 한 사람 뿐이었다. 판사는 막대한 대가를 조건으로 소년과 협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끝내 판사에게 총을 넘기지 않았다. 전직 신부는 지금이야말로 악마와 같은 판사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소년을 설득했다. 소년은 그것도 끝내 거부했다. 

 개천을 사이에 두고 숨막히는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거대한 검은 꽃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양산을 든 판사가 황야에서 소리쳤다.   

“너는 암살자도 게릴라도 아니야. 네 마음 한구석에는 흠집이 나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너만이 내 뜻을 거역했지. 너만이 네 영혼 한 켠에 천국에나 어울릴 법한 온화함을 갖고 있었어. 너는 이곳을 꿈에서 보았을 거야. 이곳에서 죽는 너 자신을 보았던 거야.”

판사가 아른거리는 열기 속에서 형체 없이 가물대다 사라졌다.

만일 그때 사막에서 인디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년과 전직 신부는 꼼짝없이 죽음을 맞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인디언의 마을에서 몸을 추스른 후 어느 새벽녘에 다시 길을 떠났다. 도시에 이르자 전직 신부는 병원을 찾으러 가고 소년은 바다를 향해 걸었다. 해변의 말 한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말은 인간이 알지 못할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이 익사하고 고래가 시커먼 망망대해로 거대한 영혼을 나르는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작가와 작품 소개]       


코맥 매카시는
1933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났다. 1951년 테네시대학교에 입학해 인문학을 전공했고 공군에서 4년 동안 복무했다. 시카고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쓴 첫 번째 장편소설 ‘과수원지기’(1965)로 포크너 상을 받았다. 이후 ‘바깥의 어둠’(1968), ‘신의 아들’(1974), 가장 자전적 내용의 ‘서트리’(1978) 등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976년 텍사스 주 엘패소로 이주했다. 1985년에 발표한 ‘핏빛 자오선’은 초기의 고딕풍 소설에서 묵시록적 분위기가 배어 있는 서부 장르 소설로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수작이자 매카시에게 본격적으로 문학적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타임이 뽑은 100대 영문소설’로도 선정되었다. 또 다른 작품으로 서부를 배경으로 한 ‘국경 3부작’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와 ‘평원의 도시들’(1998),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 ‘로드’ 등이 있다.

옮긴이 김시현은 2008년부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모두 다 예쁜 말들’ ‘리시 이야기’ ‘이중구속’ ‘심문’ ‘치명적 실수’ ‘파커파인 사건집’ ‘약탈자들’ ‘비밀의 계곡’ 등이 있다.  

 
‘핏빛 자오선’은 세계적으로 ‘매카시 열풍’을 일으킨 작품으로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묵시록적 세계관의 시원이다. 또한 비평가들로부터 그의 소설 가운데 문체와 분위기에서 

<핏빛 자오선> 김시현 옮김, 민음사刊 [모던클래식]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작품이다. 1850년대 미국 서부 국경지대에서 빚어진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한 이 작품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잔혹함과 폭력성을 까발리고, 삶과 죽음, 도덕과 전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서부 개척 신화에 철저히 가려진 미국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품으로 매카시 문학의 기조가 되는 중요한 소설이다. 출간 당시 매카시는 멜빌이나 포크너와 같은 거장과만 견줄 수 있는 작가로 추대되며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해럴드 블룸은 이 작품을 일컬어 “현존하는 미국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꼽았다. ‘타임’이 선정한 ‘100대 영문 소설’에 속하며, 뉴욕타임스가 뽑은 최근 25년간 출간된 최고의 미국 소설이기도 하다. 매카시는 이 작품을 통해 서부 개척의 신화는 결국 피로 얻어낸 백인들만의 승리였음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숭고하다고 자부하는 미국인들의 역사를 처절하게 뒤엎어 버린다. 그리고 희미하나마 인류의 한 줄기 희망을 상징하던 주인공마저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는 죽여 버림으로써, 세상의 본질은 결국 죽음과 악에 다름 아니고,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작품 속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소년에게 


어디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없는 당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래 전 과거에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겠지요. 판사는 전쟁의 화신이면서 악령과 같은 존재로서 당신의 삶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던 날을 기억합니다. 자존심을 건드린 바텐더와 한바탕 싸움이 붙었지요. 너무도 급작스런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바텐더가 취해 있지만 않았더라도 단순히 사소한 시비로 그칠 수 있는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습니다. 바텐더가 먼저 망치를 휘두르며 당신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당신은 잽싸게 몸을 피해 권총을 집어 들었습니다. 잠시나마 상대방은 새파랗게 질려 더 이상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싸움은 끝난 듯했습니다. 그러나 분이 풀리지 않았던 바텐더는 다시 망치를 들어 올렸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당신은 술병을 들어 상대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두 번째 병이 백핸드로 바텐더의 두개골을 부술 때 당신은 이미 이전의 소년이 아니었지요.

이후로 쉴 새 없이 죽음의 위기가 닥쳐왔지만 당신은 용케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단 한순간도 부릅뜬 눈을 감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대면하고 있었던 거대한 악령은 잠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무수히 많은 일을 겪으며 험한 세월을 지나 성인이 되었을 때, 여행자들과 함께 사막의 한 가운데를 지나올 일이 생겼습니다. 그곳의 지리에 밝았던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행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그들을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요. 그곳에서 당신은 살해당한 순례자들의 시신과 함께 앉아 있는 노파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나직이 말했습니다. 나는 미국인이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왔다고, 가족은 없고, 많은 곳을 여행하고, 많은 곳을 보았으며, 전쟁에 참전했고, 역경을 이겨 냈다고. 노파를 맞아 줄 동포가 있는 안전한 곳으로 내가 데려다주겠다고. 그러면서 당신은 노파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말라빠진 껍질로 긴 세월 동안 그곳에서 죽어 그대로 미이라가 돼버린 시체였습니다.

당신은 많은 경험을 통해 과거보다 더 지혜로워지고 건강했으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고 남을 도울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재난 앞에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결국엔 지켜내지 못하고 악령의 손아귀에 붙들려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까요. 

일말의 희망도 없이 당신은 죽고 악마는 춤을 추며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선명한 혈흔과, 그토록 수많은 고난을 헤치고 힘겹게 살아낸 당신이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맞았는데도 자명하게 다시 아침이 밝아온다는 사실, 그 무서운 진실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나 또한 유한한 존재임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 앞에 선,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무력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었지요. 
때문에 적어도 오늘 밤만은 당신의 죽음을 목격한 나 역시, 당신처럼 부릅뜬 눈을 쉽게 감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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